지금은 가히 불신과 의심을 넘어 분노와 증오의 시대라 할 만하다. 조금이라도 자신과 생각이 다르거나 자신에게 해가 되면 분노하고 증오한다. 맹자가 이른 대로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의 칠정(七情)이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이리니, 분노와 증오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보아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노와 증오가 쌓이면 원수가 되고 그러면 복수를 해야 한다. 복수의 시대야말로 생지옥이다. 증오와 분노가 복수로 폭발하여 무차별적인 살상을 저지르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국내적으로 지역과 당파가, 국제적으로 국가와 민족이 생각과 이해가 다르다고 서로 미워하고 성내면서 복수하려 나서고 있다.
복수라 하면 부모를 죽인 ‘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讐)’를 떠올린다.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망수애구(忘讐愛仇)’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다. 부모를 죽인 원수를 잊고 사랑하라니 수긍이 될 일이었겠는가? 김평묵(1819∼1891)은 ‘서교에서 복수를 잊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는데 인정에 가깝지 않다’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듣자니 예수의 법도는, 복수를 잊고 원수도 사랑한다지. 하늘 함께 하지 못한다 했으니, 이 이치는 천고의 밝은 진리라네”라고 했다. “아버지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는다”는 말이 ‘예기(禮記)’에 있으니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어찌 사랑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부모를 죽인 원수가 아니라면 어찌해야 하는가? 중국에도 ‘망수애구’와 비슷한 말이 있었다. 노자는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는 뜻의 ‘보원이덕(報怨以德)’을 말했고 공자는 ‘보원이덕’ 대신 곧음으로 원한을 갚는다는 뜻의 ‘이직보원(以直報怨)’을 제안했다. 이때 ‘덕’이 아니라 ‘직’으로 갚아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왔는데 그중 김창협(1651∼1708)의 설이 주목된다. 김창협은 “갚는 것이 마땅한 원한은 갚는 것이 마땅하지만, 갚지 않는 것이 마땅한 원한은 갚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또 원한의 대상이 뛰어나고 재주가 있다면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라 하더라도 공의(公義)로 그를 아끼고 취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 예로 원수지간이었던 한(漢)의 개훈(蓋勳)과 소정화(蘇正和) 사이에 있었던 고사를 들었다. 소정화가 권력을 농단하던 자를 처단하려 하다가 도리어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개훈이 힘을 써서 구해 주었다. 이에 소정화가 개훈을 찾아가 사례하려 하자 개훈이 만나 주지 않고 예전처럼 원수로 여겼다고 한다.
최고의 지식인으로 자처한 정조(1752∼1800)도 이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 “‘이덕보원’은 노자의 학설이지만 충후(忠厚)한 도가 되기에 해로울 것이 없는데, 성인이 그르게 여긴 것은 무엇 때문인가? 원한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으니, 갚는 방법도 각기 달라야 할 것 같다.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라면 덕으로 갚는 것이 본디 불가하지만 아주 사소한 원한이라면 덕으로 갚는 것이 어찌 충후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정조는 국가를 망하게 하거나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는 것이 옳지만 개인적이고 사소한 원한은 덕으로 갚는 것이 ‘이직보원’의 뜻이라 보았다. 부모를 죽인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복수를 외치는 자들은 그 ‘곧음’을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원한은 덕으로 갚되 원수는 잊지 말자.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성대중(成大中)의 이 말을 읽어보시라. “지인(至人)은 은원(恩怨)이 없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보복과 길흉은 하늘에 맡기고 그저 앉아 관망할 뿐이다. 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하다가는 스스로 망하게 될 것이니, 제재할 수 있다 하더라도 굳이 내 손을 쓸 것이 있겠는가?”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