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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 오스카와 봉준호 팬덤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왼쪽) 감독과 한진원(오른쪽) 작가. 봉준호 감독이 객석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연합뉴스




트로피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거구의 사내가 갑자기 히죽, 웃더니 객석 쪽으로 돌아서며 킥킥댄다. 그 순간 세상에는 트로피와 자신 둘뿐이라는 듯. 이게 믿어져? 나는 안 믿어져, 무대 위에서 혼잣말이라도 하듯이. 봉준호 감독의 레전드 영상은 “봉준호가 트로피를 보듯 너를 바라볼 사람을 찾도록 해” “나도 언젠가 이런 사랑을 찾아야지” 같은 농담이 줄줄이 매달린 채 소셜미디어의 바다를 떠돌아다녔다. 한 치수 작아 보이는 양복에 파마머리, 소년 같은 표정을 지닌 만화적 캐릭터의 영화 거장은 요즘 북미 밀레니얼들 사이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지난 9일(현지시간)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경이와 감탄의 연속이었지만 무엇보다 신기한 건 봉준호 열풍이었다. 지난해 8월 미국의 한 예술영화제에서 시작된 영화 ‘기생충’의 오스카 캠페인은 연말로 이어지면서 봉하이브(#Bonghive)로 불리는 거대한 열광을 만들어냈다. ‘기생충’에 대한 호평과 봉준호라는 캐릭터가 만나 폭발한 “보이밴드 수준의 팬덤”이었다.

레드카펫에서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스스로를 “XX 괴짜(weirdo)”라고 부르며 개구쟁이처럼 웃는 한국의 50대 아저씨에게 미국 밀레니얼이 녹아내리는 이 신기한 상황은 오스카 4관왕보다 더 기적 같아 보였다. 처음에는 도발 덕인가, 생각했다. 물론 아카데미를 “로컬”이라고 부르고,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넘어보라”고 권한 이방인에게 젊은층이 더 예민하게 반응한 건 맞는다. “서구 관객도 자막 읽는 걸 배워보면 좋을 것”이라는 봉 감독의 뼈아픈 지적은 “‘기생충’이 미국인을 2시간이나 ‘읽게’ 만들었다”는 식의 스탠드업 코미디로 변주돼 미국 주류사회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촌철살인이 봉하이브의 전부는 아니다.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를 향한 헌사로 시작해 텍사스 전기톱이 등장하는 농담으로 마무리된 봉 감독의 기념비적 수상소감은 지난 몇 달간 이어진 봉준호 연설의 완결편 같은 것이었다. 그는 아프리카계미국인영화비평가협회(AAFCA) 시상식에서 스파이크 리 영화의 자막 작업을 했던 사연을 전하며 “존경하는 리 감독 덕에 영어 욕을 많이 배웠다”고 말해 환호와 웃음을 이끌어냈고, 미국작가조합 작가상을 받을 때는 함께 후보에 오른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를 향해 “우리 시대 최고의 스크립트. 질투가 난다”는 말로 열광적 박수를 받았다. “시네마라는 하나의 언어”를 공유한 동료들이 서로의 진가를 인정해주는 이런 장면들은, 어느 유튜버의 말처럼 “청중에게 정치 설교나 해대는 할리우드 엘리트”에 신물난 밀레니얼의 마음을 움직였다. 함께한 배우들을 향한 봉준호의 애정에도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봉 감독이 자신의 휴대전화로 ‘기생충’ 배우들의 영상을 찍는 모습은 트위터리안의 손에서 ‘자랑스러운 아빠(proud dad)’ 패러디로 재탄생했다.

마지막으로 ‘미투’로 퇴출된 할리우드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과의 일화. ‘설국열차’ 배급을 맡은 와인스타인이 유명한 생선 장면을 가위질하려고 했다. 봉 감독은 이 신을 어부였던 아버지에게 바치고 싶다고 호소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봉 감독 아버지 고(故) 봉상균씨는 국내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 악당을 상대로 통쾌한 한방. 케이퍼 무비의 한장면 같은 반전. 성실성, 조용함, 집단의식? 봉하이브의 어디에도 아시아인을 규정지어온 고정관념의 흔적은 없다. 오직 천재성과 개성으로 소비되는 캐릭터 봉준호의 시대. 한국인에게 진정 문화의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모양이다.

이영미 온라인뉴스부장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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