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어디서부터 왔을까. 종종 곰곰 생각해본다. 단어의 유래, 생김새와 뜻, 문장에서의 쓰임, 유의어와 반의어 같은 것들을 뒤적이며 논다. 문장에 종속되기 이전 개별체로서의 단어들, 문장에 속한 뒤 사명과 의무를 부여받은 단어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언어를 여행하는 일은 신나고 재미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에 이름씨가 있고 세상의 모든 행위에 움직씨가 있다는 것을, 내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다는 것을 처음 배운 그때는 얼마나 놀라웠을까. 말문이 터진 아이들이 끝없이 질문을 쏟아내는 이유는 그 때문일 거다. 그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흥분되는 순간 ‘빅5’에 들기에 충분할 텐데,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삶이 심심해지는 이유일 거다.
단어들이 상반되는 두 개의 뜻을 갖고 있거나 상반되는 뜻의 단어들이 같은 발음을 가진 것을 보면 놀랍고 흥미롭다. 일테면 ‘묻다’라는 말. ‘무엇을 밝히거나 알아내기 위해 대답이나 설명을 요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 말은 동시에 ‘흙이나 다른 물건 속에 넣어 보이지 않게 덮어두거나 어떤 일이 드러나지 않도록 숨기고 감추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밝히는 것과 숨기는 것이 같은 단어라니!
대한민국 국민들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광고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보험 광고가 있다. 주로 30~50대에게 가입을 권유해온 보험사들을 향해 이제 새로운 타깃을 향해 질주하라는 신호탄을 쏘아준 보험상품. 고령사회로 진입하는 2006년, 때맞춰 노년층을 타깃으로 출시된 보험상품은 크게 히트를 쳤다.
건강과 병력 등을 일일이 묻고 따지지 않는 가입 방법은 보험설계사를 거치지 않고 TV 광고와 홈쇼핑을 통해 안방의 소비자들에게 ‘다이렉트’로 말을 거는 데 성공했다. 복잡하고 어렵고 불편한 것을 꺼리는 노년층의 성향을 확실하게 이해한 마케팅 전략도 유효했다. 요샛말로 ‘신의 한 수’라고 할 수 있는 모델 선정과 카피는 전략을 완벽하게 실행에 옮겼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입시켜준다는 카피는 기업이 소비자에게 약속하는 혜택(benefit)이었는데, 정작 소비자들로부터 혜택을 받은 쪽은 기업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입시켜준다는 말에 수많은 어르신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입해버렸으니.
어머니, 아버지들이여, 보험상품을 구입할 때는 부디 물으시라. 광고 뒤에 속사포처럼 빠르게 덧붙는 조건들을 묻고 또 따지시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상품은 당신이 상품에 대해 덮어놓고 가입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시라. 아무것도 따져 묻지 않고 그냥 ‘묻고 더블로’ 가는 상품은 한 끼 패스트푸드 정도면 충분하다. 오, 아니다. 모든 상품은 구입하기 전에 더 철저히 따져 묻는 것이 소비자의 권리다.
‘따져 묻다’와 ‘덮어두다’의 멀고 먼 거리를 단 하나의 단어로 ‘퉁쳐’버리는 우리말의 신묘함을 이처럼 용의주도하게 사용한 카피라이터에게, 아직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한 카피라이터로서 경의를.
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