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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내가 아닌 우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불안감이 팽배했던 지난 7일 일본인 10여명이 부산항을 통해 입국했다. 오카마사하루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 관계자인 이들은 이튿날 부산 남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방문한 뒤 영도구 땅끝교회 일본어예배부를 찾았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피폭 조선인들을 위해 헌신적 삶을 살다 간 인권운동가 오카 마사하루(1918~94) 목사를 기억하는 세미나를 열기 위해서였다.

오카 목사는 18년 11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기독교를 접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생계를 위해 해군 전신병 시험을 보고 직업 군인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을 통해 난징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자신이 일본군에 속했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꼈다. 성서를 열독한 그는 45년 히로시마 앞바다 에타지마의 해군 학교에 배속돼 복무하던 시절, 일왕에게 전쟁 종결을 직소(直訴)하자고 제안하다 상급 군인들로부터 집단 린치를 당하고 투옥된다. 전시에 처형을 각오한 일왕 불복종 선언이었는데 그때 히로시마의 원폭 버섯구름이 나타났다. 이후 일왕의 항복 방송이 울려 퍼져 풀려나게 된다.

신카이 토모히로 평화자료관 부이사장은 세미나에서 “패전 당일 많은 이가 일본이 졌다고 울었지만, 오카 목사는 11년여 군 생활 가운데 불과 일주일만 일본 군국주의에 항의했다고 반성하며 울었다”고 밝혔다. 다메섹 도상에서 극적으로 회심한 바울처럼 오카 목사는 이후 일왕 숭배의 과거를 회개하고 도쿄의 신학교에 입학해 목사가 된다.

56년 나가사키 루터교회에 부임한 오카 목사는 65년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발족해 30년 가까이 일본인을 대상으로 싸웠다. 조선인을 위해서였다. 같은 원폭 피해자도 일본인이면 원호 수당을 받았지만, 조선인은 철저히 배제되고 무시됐다. 오카 목사는 식민지배와 강제동원에 이은 피폭으로 이중 삼중의 피해를 받은 조선인을 두고 못 본 체하는 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아니라고 했다.

오카 목사와 운동가들은 나가사키 주변을 발로 뛰며 증언을 채집해 ‘원폭과 조선인’ 자료집을 6권까지 냈다. 600만명이 관람한 영화 ‘군함도’도 이들의 헌신에 기반을 뒀다. ‘지옥도’ 별명을 가진 하시마 탄광 강제동원 명부 등을 수집해 한국에 건네고 작가 한수산을 통해 이를 알린 이도 오카 목사다. 94년 7월 별세한 그의 묘비에는 ‘믿음 소망 사랑’이 새겨져 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에서 비롯했다.

코로나19 지역 확산이 심각하다. 전국 어디도 안전하지 못한 게 현실이다. 이때 중요한 건 ‘내가 아닌 우리’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우리를 위한 개인 위생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목회 서신을 통해 당부했다. 자신에게 이상 징후가 나타나면 우리를 위해 신속하게 정부의 매뉴얼대로 공개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의 유일한 방역망이다.

차별과 혐오, 배제는 답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개·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강제동원돼 원폭 피해를 입은 조선인들과, 신앙의 양심으로 평생을 함께한 일본인 목사의 삶이 이를 호소하고 있다. 최근 식당 앞에 ‘중국인 출입금지’를 붙였던 우리가 이젠 세계 공항에서 같은 일을 당하고 있다. 대재난 앞에서 무력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우리 모두가 상호의존적인 생명의 안전망 속에 포함돼 있다는 자각이다.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해 서로 돕는다는 인류 공동체의 기본 원칙이 재난 극복의 첫걸음이다.

우성규 종교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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