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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 나는 ‘괴물 쥐’를 먹은 적이 있다



괴물 쥐라고 불리는 동물이 있다. 쥐목에 든다. 대문니가 길게 툭 튀어나와 있고 꼬리는 집쥐와 흡사하다. 뉴트리아다.

고기가 맛있고 가죽을 이용할 수 있어 세계 곳곳에서 가축으로 키운다. 1980년대에 식용 가축으로 국내에 들여왔다. 10년도 안 되어 사달이 났다. 뉴트리아 사육 농가들이 판매처를 확보하지 못했다. 사료비 부담 때문에 농가들이 뉴트리아를 방치했고, 뉴트리아는 생존을 위해 사육장에서 탈출했다.

뉴트리아는 습지와 저수지에 숨었다. 한국의 자연 환경에 적응해 새끼를 낳았고, 날로 번창해 여기저기서 불쑥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처음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쥐인데 몸집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괴물 쥐라는 별명이 붙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생태계 교란종이 됐다.

나는 이 괴물 쥐를 먹었다. 1990년대 사육 농가에서의 일이다. 사육장의 뉴트리아부터 보았는데, 큰 쥐이기는 하나 징그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공격성이 없었다. 함께 간 어린 딸은 귀엽다며 뉴트리아를 안기까지 했다.

뉴트리아 고기는 옅은 붉은색을 띠었고 고기 사이사이에 기름이 가느다랗게 박혀 있었다. 탕수육, 소금구이, 양념구이, 전골, 카레 등을 요리해 먹었다. 육향이 연했다. 고소한 맛은 적었으나 옅은 기름 향이 기분 좋게 입안을 감돌았다. 조직감은 돼지 갈매기살과 비슷했다.

내 어린 딸도 먹었다. 그 고기가 조금 전에 귀엽다고 품에 안은 동물의 것이라고는 말해주지 않았다. 맛있게 잘 먹었다. 특히 탕수육은 싹싹 비웠다. 동행한 어른이 있었는데, 고기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공포에 휩싸여 있는 표정이었다. 커다란 쥐를 맛있게 먹고 있는 부녀를 괴이하게 여겼을 것이다.

인간은, 잔혹할 때도 있으나, 눈앞에서 동물이 죽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인데, 이는 본능이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도축장을 아예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 밖으로 밀어버렸다. 평소에 잘 먹는 소 돼지 닭도 도축 과정을 보게 되면 그 가축의 음식을 당분간 못 먹어낸다. ‘살육의 현장’을 의식적으로 회피함으로써 고기에 대한 입맛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며 마침내 문명인은, ‘고기’라고 하면 먹기 좋은 상태로 가공된 고기 덩어리나 조리된 고기 요리를 연상하게 됐고, 그 고기의 출처인 소 돼지 닭의 원래 형체와는 심리적인 거리를 유지해 마음 편히 고기를 즐길 수 있다.

만약에 뉴트리아 농가에 동행한, 고기를 먹지도 않은, 그 어른에게 뉴트리아를 보여주지 않고, 사진으로도 보여주지 않고, 쥐목의 동물이라는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맛있게 보이는 뉴트리아 고기만 내놓고 맛보라 했으면 어땠을까. 더하여 “이 고기가 유럽에서는 고급스러운 음식에 들지” 했으면 어땠을까. 아무 정보가 입력되지 않은 내 어린 딸이 맛있게 먹듯이 그 어른도 맛있게 먹지 않았을까.

내가 뉴트리아를 먹은 적이 있다고 말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린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뉴트리아의 가공된 고기나 요리를 본 적 없으니 뉴트리아를 먹었다는 말에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그림은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았던 괴물 쥐밖에 없다. 이어서 괴물 쥐를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토막을 내는 영상이 머릿속에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음식은 입으로 먹는다 하지만, 사실은 머리가 먼저 먹는다. 맛있고 맛없음을, 먹을 만하고 먹을 만하지 않음을, 머리에서 먼저 판단을 하고 입안에 음식을 넣는다. 문제는, 내 머릿속에 음식 선택의 합리적인 판단을 이끌 만한 충분하고 섬세한 정보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호불호의 입맛을 스스로 의심하는 버릇을 붙일 필요가 있다. 여러분의 미각을 믿지 마시라.

황교익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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