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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주의 알뜻 말뜻] 저는 사모님이 아닙니다



한때 ‘미시(Missy)’라는 용어가 미디어를 통해 시중에 널리 쓰였다. 일부러 ‘미스(Miss)’와 ‘미즈(Mrs)’를 혼동하라고 만든 신조어. 영어로는 아가씨라는 뜻이지만 미국 본토에서 원래의 뜻이 그러든 말든 우리는 아가씨 같은 주부라는 뜻으로 살짝 비틀어 썼다. 결혼하고도 아줌마가 아니라 아가씨라고 불리기를 갈망하는 여성들에게 ‘미시’라는 말은 사탕처럼 달았다. 나를 아가씨로 착각해주는 곳이라면 얼마든지 상품 값을 지불할 의향이 있고말고. 90년대 대한민국의 백화점에는 미시들이 넘쳐났다.

백화점에서 아줌마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 것처럼 금융업계나 보험업계에서는 노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고령층이라고 쓰고 어르신이라고 불러드린다. 한층 더 그럴듯하게 들리라고 실버세대라고 쓰거나 시니어라는 영어를 쓴다. 몇 해 전에는 ‘액티브 시니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지긋한 나이에도 왕성하고 활동적이려면 응당 소득 수준이 높아야 할 거다. 같은 고령층이라 해도 상품을 구입할 여력이 없는 이들만 노인이라 불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호칭이란 얼마나 야멸찬 것인가!

매장에 들어오는 중년남자들은 모두 사장님들이다. 만년 과장도 사장님이고 구조조정으로 밀려난 부장도 사장님이다. 실업자라도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피하지 못한다. 나는 혹시 이들이 쓰는 사장님이 ‘社長’이 아니라 스승이나 나이 많은 어른을 뜻하는 ‘師長’은 아닌가 궁금했다. 국립국어원에 문의해보니 그 뜻으로 쓰는 말은 아닐 거라는 다소 모호한 답변이 돌아왔다. 내 짐작에도 회사 대표라는 뜻으로 쓰는 사장이 맞을 것이다. 직업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다. “손님은 꼭 사장님처럼 (돈이 많아) 보이니, 이 정도쯤은 망설이지 말고 사세요.”

남자 손님들이 모두 사장님이라면 여자들은 사모님이다. 스승이나 윗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르는 말인 사모님은 남편의 지위에 기댄 호칭이다. 중년여성 손님에게는 사장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도 여성을 사회적으로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거다. 일정 정도 나이가 든 남자를 모두 사장님이라 부르고 그와 비슷한 연령대의 여자를 사모님이라 부르는 이 사회의 관습적 호칭은 직업에 대한 편견, 여자에 대한 편견의 결과다. 재래시장, 마트에서 삼사십대 이상의 여자에게 거리낌 없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또 어떤가? 어머니라는 말의 지극한 포용력에도 불구하고 이 호칭은 지나치게 획일적이거나 심지어 폭력적이다. 비혼가구 수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한 여성이 평생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가 0.92명으로 한 명의 자녀도 갖지 않는 여성이 많아진 요즘 시대, 설령 기혼자라고 해서 어찌 다 어머니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여성 고객을 굳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어머니라면 이런 것은 꼭 사셔야 합니다.”

우리 일상의 호칭은 이렇듯 대개 상업적 속내를 담고 있다. 어차피 상업적 목적이라면, 손님이라거나 고객님이라고만 해도 좋을 것을 굳이 편견 가득한 호칭으로 불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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