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는 역설로 가득 차 있다. 신과 인간의 만남, 이보다 더 역설적인 사건이 어디 있는가. 예배에 가득 차 있는 역설은 다음과 같다.
예배는 높임과 낮춤이 필요하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끝없이 높이는 것이 예배이고 동시에 질그릇 같은 인간을 한없이 낮추는 것이 예배다. 그래서 예배는 높임과 낮춤의 역설이다. 예배는 강함과 약함이 조우한다. 예배는 내 약함 가운데 깃든 하나님의 강함을 경험하게 한다. 그래서 예배는 강함과 약함의 역설이다.
예배는 은혜와 의무의 조화다. 예배 가운데는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 부어지지만, 사람들이 준비해야 하고 정성을 다해 드려야 할 의무를 면제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배는 은혜와 의무의 역설이다.
예배는 또 열림과 닫음을 함께한다. 예배 중에 하늘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기도가 공중에서 사라지고 찬양은 사람들의 귀에만 떨어지고 말씀은 하늘에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강연에 종교적 언어를 입힌 정도라면 이런 시간 낭비가 어디 있겠는가. 예배 중에 마귀의 정죄와 세상의 소리에 귀를 닫지 않는다면 차라리 콘서트에 가서 잠시 기분이나 푸는 것이 낫겠다. 그래서 예배는 열림과 닫음의 역설이다.
예배는 버림과 채움이 절실하다. 우리가 이렇게 부르지 않는가.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주소서 넘치도록 채워 주소서.”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잔을 채워주시길 원하시는데 우리 잔에 여전히 헛된 것이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하늘의 것을 부어 주시겠는가. 그래서 예배는 버림과 채움의 역설이다. 예배는 기쁨과 애통이 교차한다. 지상 최고의 기쁨이 예배에 있다. 사랑의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 때문이다. 지상 최대의 애통이 예배에 있다. 공의의 하나님 앞에 내가 행한 일 때문이다.
다른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 예배 중에 듣는 복음 때문에 기뻐하라. 다른 것으로 애통하지 말라. 예배 중에 보는 나의 죄악 때문에 애통하라. 그래서 예배는 기쁨과 애통의 역설이다.
예배는 용서와 책망을 반복한다. 예배에는 예수님의 보혈이 흐른다. 나의 죄를 씻고 나를 용서하는 보혈이다. 예배에는 성령님이 운행하신다. 나를 날카롭게 책망하시는 성령님이시다. 예배를 드리면서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를 목쉬도록 부르고 또 부른다.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를 목 놓아 부르고 또 부른다. 그래서 예배는 용서와 책망의 역설이다.
예배는 수직과 수평의 만남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다는 점에서 수직이라는 방향을 갖고 있다. 예배는 함께 드린다는 점에서 수평이라는 방향도 갖고 있다. 예배실의 의자가 빙 둘러 있어 하나님보다 사람들이 서로 너무 잘 보이거나 친교실의 의자가 다정스럽게 둘러 있지만, 마음의 의자는 뒤로 돌아 놓여 있다면 수직과 수평을 거꾸로 적용한 예배일 것이다. 주만 바라보는 수직, 서로 돌아보는 수평. 그래서 예배는 수직과 수평의 역설이다.
예배는 과거와 미래의 연결이다. 오늘의 예배는 오늘만 생각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시간이요 미래를 바라보는 시간이 오늘의 예배 가운데 있다. 오늘 드리는 예배 가운데 자꾸 들려온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또 들려온다. “기대하라, 기대하라, 기대하라.” 그래서 예배는 과거와 미래의 역설이다.
예배는 ‘오라’와 ‘가라’를 요청한다. 예배는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고 부른다. 예배는 “가라 가라 세상을 향해”라고 명한다. 그래서 예배는 오라와 가라의 위대한 역설이다.
김성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