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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님 초청장엔 ‘돈 없이, 값 없이 오라’



예배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예배는 사람의 고안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초청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예배를 알지도 못했고 시작도 못 했을 것이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 55:1~3)

하나님의 초청은 돈 없이, 값없이 오라는 초청이다. 왜 돈 없이 값없이 오라고 초청하셨을까. 예배가 값싼 것이어서 그럴까. 아니다. 예배에는 어떤 값(price)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가치(value)가 있기 때문이다.

다윗 왕이 죽은 개와 같던 므비보셋을 왕의 식탁으로 초청한 것은 요나단이 있어 가능했다.(삼하 9:1~8) 요나단의 아름다운 가치는 그 어떤 값으로 매길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신 것은 당신 아들의 죽음이라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값으로 매길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가장 고귀한 가치를 지니신 분이시다. 초청자가 가장 고귀한 가치를 치르고 값없이 초청한 것이 예배다.

어떤 분의 초청을 받은 적이 있다. 직접 차려준 음식 하나하나에 정성이 담겼으며 맛도 일품이었다. 초청자의 후덕함을 그가 차려준 음식을 보고 알게 됐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초청자와 만남이었고 즐거운 대화였다. 초청자와 직접 만날 수 없고 그 누군가를 통해 전달해준 음식을 먹었다면 그런 자리를 진정한 초청의 자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초청이란 말 속에 직접 초청, 간접 초청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초청은 직접 초청, 단 하나뿐이다. 예배는 후덕하신 하나님의 초청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후덕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1~12)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기독교인 사이에 화제로 떠오르는 것이 미디어 예배다. 미디어로 예배드리는 것은 진짜 예배일까. 하나님은 과연 미디어 예배로도 초청하시는가.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나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을 여러 번 보았다. 사진집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도 보았다. 인터넷에서. 물론 사진집과 인터넷이 도움이 됐다. 가장 중요한 도움은 언젠가 진짜 작품을 보고 싶다는 동기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마침내 유럽 여행을 갔다. 드디어 나도 시에스타 성당에서 천지창조를 직접 봤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진품 모나리자도 직접 봤다. 작품에 대한 짙은 감동은 물론 그런 위대한 작품을 그린 작가에 대한 경외감마저 떠올랐다.

미디어 예배로는 설교자를 매개로 한 인격적 교감이 난망(難忘)하다. 그리스도의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지는 것을 확인할 길도 없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한자리에 모여 시행해야 할 성찬식도 할 수 없다.

어려운 현실이라고 미디어 예배가 또 하나의 완전한 예배라고 주장한다면 코로나19 사태는 탈교회(脫敎會) 시대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런 주장은 가견적(可見的) 교회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미디어로 참여하는 예배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그 도움 중에 백미는 진짜 예배에 참석하고 싶은 열망을 주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직접 초청이다. 그러므로 미디어 예배는 진짜 예배로 초대하는 좋은 도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김성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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