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는 거룩한 자리다. 언약의 성취에 놀라고 언약의 신실함에 감격해 하고, 보잘것없는 인생과 언약을 맺어주신 하나님을 견고히 신뢰하리라는 자리, 그 하나님을 크게 말하고 송축하는 자리가 예배의 자리다.(시 105:1~10)
오늘날 많은 예배가 언약을 기억하는 기능을 잃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오랜 언약은 가벼이 취급되고 오늘 떠오른 생각들과 새로운 방식이 아주 묵직하게 다뤄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언약궤를 빼앗겼다. 그 언약궤는 어디로 갔는가. 블레셋 사람들이 아스돗 다곤의 신전에 두었다. 그들은 불길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자 언약궤를 돌려보내기로 한다. 이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서 수십 년간 머물러 있었다. 사울왕은 그의 통치 기간 이 언약궤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다윗왕은 달랐다. 왕이 된 다윗은 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는 열망이 있었다. 마침내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실어 옮기려 했다. 그 계획은 대실패로 끝났다. 새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뛸 때 언약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었던 웃사가 죽은 것이다.(삼하 6:1~11)
언약궤는 새 수레에 실어 옮기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어 옮겨야 했다. 3개월 뒤 말씀의 방법을 따라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예배를 드렸다. 언약궤 앞에서의 예배가 얼마 만인가. 통탄할 세월이었다. 언약궤 없이 드린 예배의 세월을 말한다.
언약궤가 블레셋에 빼앗긴 세월, 언약궤가 아비나답 집에서 무시된 세월, 언약궤가 한때나마 다윗에게 잘못 다뤄진 세월은 예배의 암흑기와 같았다. 우리도 우리의 예배가 언약을 빼앗긴 예배, 언약을 무시하는 예배, 언약을 잘못 대하는 예배가 아닌가 둘러봐야 한다.
그렇다. 우리가 진정한 예배자라면 인디아나 존스보다 못해서는 안 된다. 인디아나 존스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레이더스’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인디아나 존스는 잃어버린 언약궤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고고학자다. 그가 언약궤를 찾고자 하는 이유는 정치적이며 군사적이다. 우리는 어떤가. 신앙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음에도 예배 가운데 잃어버린 언약을 찾고 또 찾는가.
찬송가 14장은 의미심장하다. 2절은 이렇다. “주 언약하신 것 끝까지 지키니 저 하늘나라 향하여 곧 가리라 주 얼굴 뵈올 때 내 맘이 기쁘고 영원히 주의 영광을 찬양하리.” 찬송가 370장 4절은 이러하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두 찬송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언약을 품은 찬송들이다. 예배에서 하나님과 맺은 불변의 언약을 기억하지 않으면 어디에서 그 언약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이 같은 하나님의 언약들을 예배 가운데 다시 기억하고 다시 붙잡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지푸라기 같은 것을 붙잡고 위안으로 삼거나 그 세상을 두려워하며 살게 된다.
우리는 세상 나라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똑똑히 보고 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결코 쇠하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언약 백성이다. 예배 가운데 언약의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셔야 하고 언약의 백성들은 그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위풍당당함을 되찾아야 한다. 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면서.
김성국 목사(미국 퀸즈장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