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3일 미성년자를 포함한 성착취 사건인 ‘n번방 사건’ 메시지를 내놓았다. 운영자는 물론 회원 전원 조사와 강력한 처벌, 특별조사팀 구축과 신종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근절책 마련, 적절한 피해자 지원을 지시했다.
정부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여성가족부를 중심으로 한 관계부처는 대통령 지시 하루 만인 24일 정부 대응 방안을 발표했다. 미성년자를 이용한 음란물 범죄 처벌 근거를 마련해 처벌 수위를 높이고, 피해자 신고 창구를 운영하며, 디지털 성범죄 전문 변호인단으로 법률지원단을 꾸리기로 했다. 경찰은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본부’를 꾸렸고, 검찰은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 TF’를 만들었다. 법무부는 n번방 운영자뿐 아니라 회원들을 처벌하기 위해 ‘범죄단체 조직죄’(형법 114조) 적용이 가능하다는 의견도 밝혔다. 철저하게 수사해서 강력하게 처벌하겠다는 얘기였다.
국회 움직임도 신속했다. 백혜련 의원 등 더불어민주당 여성 의원들은 대통령의 지시가 나온 당일 ‘n번방 사건 재발금지 3법’을 발의했다. 송희경 의원 등 미래통합당 여성 의원들도 25일 ‘n번방 방지법’을 발표했다. 이후로도 많은 의원들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공동 발의하거나 발의하겠다고 했다.
국민의 분노, 문 대통령의 특별 지시, 정부의 신속한 대처, 정치권의 법 개정 약속이 맞물려 쏟아졌다.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수순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미심쩍은 눈으로 n번방 이후를 바라본다. “지금은 호들갑을 떨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될 거야. 또 다른 조주빈이 나올 거야”라고 생각한다.
비관적인 관측은 과거 경험에 근거한다. 문 대통령은 2019년 3월 18일 박상기 법무부 장관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을 불러 장자연·김학의·버닝썬 사건에 대한 특별 지시를 내렸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과 부실수사 조직적 비호, 은폐와 특혜 의혹을 명명백백하게 밝히라고 지시했고, “검찰과 경찰의 지도부가 조직의 명운을 걸라”고도 했다. 당시에도 정부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가 활동기한을 연장했고, 김학의 수사단이 꾸려졌으며, 경찰의 버닝썬 사건 수사팀이 확대됐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실체적 진실은 여전히 의혹으로 남았고, 부실수사와 조직적 비호는 증거가 없었고, 은폐와 특혜도 밝혀진 게 없었다. 어떤 이들은 대통령의 지시를 ‘무리한 지시’라고 비난했고, 어떤 이들은 검찰과 경찰이 여전히 권력층을 비호하고 자기 식구를 챙기고 진실을 은폐했다고 분노했다.
비슷한 실패의 경험들은 왜 되풀이되는 것일까. 대통령이나 검찰총장이 문제일까. 그렇다면 문제 해결이 쉽다. 대통령을 바꾸고, 검찰 수뇌부를 바꾸면 된다. 그러나 교체만으로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장자연·김학의·버닝썬이 알려준 n번방의 교훈은 ‘분노나 비난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n번방 문제에 대한 답안은 모두 알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 실태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 왜곡된 성 의식과 혐오를 극복하기 위한 교육의 문제, 생산·유통·소비로 이어지는 음란물에 대한 적절한 조치, 제도적 개선과 부작용을 막기 위한 대책 마련, 사생활 보호와 범죄의 경계선 확립 같은 것들이다. 지루하고 재미없고 복잡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견디는 끈질김과 체력을 갖추지 못하면, 비슷한 문제가 계속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비난·분노·선언 대신 문제 해결을 위한 방식과 과정에 주목할 때다. 단거리 경주에만 익숙한 우리 사회가 장거리를 고민할 때가 됐다.
남도영 편집국 부국장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