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칼럼  >  기타

[가리사니] 공무원은 영혼이 필요한 존재



현 정권 출범 후 기자들 몇 명과 저녁을 먹을 때다. 당시 기획재정부와 청와대의 갈등설이 있어 자연스럽게 ‘관료의 역할’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정치부를 오래 출입한 모 기자는 공무원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공무원은 당연히 영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권 창출은 국민이 선택한 것이고, 이는 그들의 철학과 기조가 이미 국민의 동의를 받았다는 걸 의미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공무원은 국민이 동의한 현 정권의 정책 추진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저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기자의 말에 따르면 행정부는 ‘집행기관’에 불과하다. 정권이 철학을 정하면 기술적으로 구현하는 곳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공무원의 영혼은 위험하다. 국민이 동의한 철학과 기조에 어깃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사회의 변화를 고려해도 공무원의 영혼은 위험하다. 집행기관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정권이 과감한 도전을 하고, 국민의 동의를 받아 ‘이상’이 ‘현실’이 되면 세상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이 말은 찝찝함을 남겼다. 전제가 틀릴 때다. 정권의 판단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철학의 현실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래도 공무원은 영혼이 없어야 할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을 겪으며 이 고민은 깊어졌다. 마스크 사태 때다. 한동안 전 부처는 마스크 조달에 매달렸다. 그러나 모든 부처 장차관이 매일 현장에 나가는 모습은 다소 불편했다. 위기를 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각자의 역할을 차질 없이 수행하는 것이다. 정치권의 주문 속에서 거시경제를 살펴봐야 할 기재부 장차관, 각종 분쟁을 살펴봐야 할 공정거래위원회 관료 등이 마스크 현장에 동원됐다. 그 사이 내수는 급격히 추락했고, 수출·금융시장엔 비상이 걸렸다. 계약 취소로 분쟁은 급증했다.

재난지원금 도입 과정은 더 불편했다. 정치권의 재난기본소득은 전통적인 기본소득 개념과 달랐다. 현금수당(일부, 한시적)을 할 것인지 기본소득(모두, 주기적)을 할 것인지 사회적 논의가 필요했다. 우리나라에 맞는 수준에 대한 분석도 필요했다. 국가채무비율은 국내총생산(GDP)과 연동된다. 효과만 있다면 ‘국가채무비율 증가→경제 성장→국가채무비율 다시 감소’의 선순환이 가능하다.

재난지원금 지급 방식과 효과, 국가채무비율 40%대 유지 등에 대해 정권과 행정부의 협력이 필요했다. 정치권은 새로운 생각을 하고, 행정부가 경험과 전문성을 통해 현실 가능성을 진단해야 했다. 세입 확대, 지출 조정, 미국과 일본처럼 중앙은행 국채 매입을 통한 재정 여력 확대 등 이 기회에 우리나라와 맞는 재정정책 운용 그림도 다시 그려야 했다.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줄 것인지 설계도 필요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생략됐다. 행정부의 분석은 그저 ‘공무원들의 답답한 소리’로 여겨졌다. 반면 5월이 넘어야 지급할 수 있음에도 정치권은 총선을 겨냥해 발표를 서둘렀다. 그러면서 재난지원금은 설익은 상태로 도입이 결정됐다.

여기서 느낀 건 정권의 불완전함이다. 국민은 정권의 기반인 동시에 약점이 된다. 표심(票心) 앞에서는 정권의 판단도 흔들린다. 그리고 이때 바로잡아줄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행정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경험과 전문성이 균형을 찾아줄 수도 있다. 정권과 공무원의 관계는 주인과 행동대장의 관계가 아니라 ‘협력’과 ‘견제’가 공존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공무원은 영혼이 필요한 것 같다. 특히 요즘처럼 선거를 앞두고 모든 이들의 마음이 바빠질 때는 더욱 그렇다. 정치권은 행정부가 못하는 과감한 꿈을 꾸고, 행정부는 정치권의 위험한 꿈을 막는 균형은 불가능한 걸까.

전슬기 경제부 기자 sgjun@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