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바람이 콧구멍을 간질이는 춘삼월, 이러한 때 집 안에만 있자니 속이 답답하다. ‘와유’라는 말이 떠오른다. 와유는 중국 송나라 때의 문인 종병(宗炳)이 늙고 병들어 명산대천을 유람하지 못하게 됐을 때 마음을 맑게 하고 도리를 살피면서 누워 유람할 수밖에 없다고 탄식한 데서 나온 말이다. 늙고 병들어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나 바이러스 창궐로 집 밖에 나서기 어려운 것이나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으니, 와유라는 말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17세기 조선의 매운 선비 박세당(朴世堂)은 와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호사가들이 온 천하를 다 유람하기가 이처럼 어려운 것을 보고, 또 그러한 힘을 갖추지 못한 것을 근심하여, 그림으로 명산을 그려 눈앞에 펼쳐놓고 이로써 천하의 산수를 감상하는 멋을 붙이고는 이를 와유라고 하였으니, 이는 자신에 맞는 방편을 취한 것일 뿐이다.”
박세당이 이른 와유라는 방편을 우리도 따를 수 있다. 와유는 추억과 상상을 바탕으로 한다. 가본 곳을 사진으로 다시 보면서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고, 가지 못한 곳을 책이나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상상으로 즐길 수 있다. 중국 송나라 학자 소강절(邵康節)은 “문 밖을 나서지 않고도 곧바로 천지와 만난다(不出戶庭 直際天地)”고 했다. 영남 출신의 학자 장현광(張顯光)이 “천 리를 순식간에 정신으로 구경하고 만고의 세월을 삽시간에 눈으로 본다(神千里於瞬息之間 目萬古於須臾之頃)”고 한 말도 그 뜻이 다르지 않다. 와유는 병이나 늙음에 구애되지 않고 돈과 시간이 들지도 않으니, 요즘 세상에 가장 맞는 여행이다. 실학자 이익(李瀷)도 와유에 대해 멋진 글을 남겼다.
“와유라는 것은, 몸은 누워 있지만 정신은 노닌다는 뜻이다. 정신은 마음의 신령함이니 그 신령함은 어디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온 세상 곳곳을 훤하게 비추어 보고 만 리 먼 곳을 순식간에 달리면서도 어떤 다른 교통수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다. 사물의 형태를 인지하는 것은 시각기관에서 담당한다. 처음부터 시각이 없으면 생각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꿈속에 어슴푸레하게 나타나는 것들도 어느 하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것은 없다.”
이런 편리한 상상의 여행도 더욱 생생한 기억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있으니 자신의 추억이다.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체험이 있어야 기억이 또렷해진다. 꿈의 여행지를 소개한 책이 서점에 넘쳐나고 텔레비전만 틀면 바로 여행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지만, 자신이 그곳에 가본 추억이 없다면 남의 일일 뿐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이익은, 글과 그림이 와유의 방편이 될 수 있겠지만 자신이 직접 가서 본 것이 아니라면 그 경치를 마음속으로 상상할 수는 있지만 실제의 광경을 사실 그대로 떠올리지는 못한다고 했다.
나의 추억을 가지고 나의 와유를 즐기고 싶다. 이제 좋았던 시절의 사진을 펼쳐놓을 때다. 다만 사진은 시각을 통한 기억의 매개에 그치는지라 그 시절의 마음은 기록되지 못했다. 바깥출입이 꺼려지는 요즘 빛바랜 사진을 찾아 흐릿한 추억을 떠올려본다는 이들이 많다.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 사진 귀퉁이에 한 줄 글이라도 남겨놓았으면 그 추억이 좀더 또렷할 텐데. 나 자신도 실천하지 못했지만 남들에게 늘 하는 말, 사진만 찍지 말고 그 사진 속에 담긴 마음을 글로 함께 남겨보시라고. 더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 지금이라도 빛바랜 사진을 찾아 글을 적어보는 것이 요즘 같은 때 하기 좋은 일인 듯싶다. 집 안에서 가족들과 사진을 함께 보면서 한 줄씩 글을 붙여보는 놀이를 하면 혹 바이러스로부터 망외의 소득을 얻지 않을까. 지금은 추억과 상상을 바탕으로 누워서 노니는 와유의 시대다.
이종묵 (서울대 교수·국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