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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혐오에 기생하는 정치의 퇴장



선거 다음 날 아침은 늘 놀랍다. 대단한 전략가가 애써 머리를 굴리고 기획해도 도무지 생각해낼 수 없는 오묘한 표심의 결정체를 내놓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생각으로 투표를 했을 텐데, 어떻게 이런 절묘한 결과가 나왔을까. 꼭 ‘유권자’들이 집단 창작해서 내놓은 종합예술 작품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15일 치러진 21대 총선의 유권자는 4399만4247명, 그중 66.2%인 2912만8040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유권자 수천만명의 생각은 다 다를진대, 어쩌면 꼭 떨어뜨려야 할 사람을 이렇게 골라내서 떨어뜨리는지 놀랍다. 전체 판세나 승패, 후보자의 존재감과 상관없이 매번 선거 때마다 ‘이 사람은 그만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어김없이 낙선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정치의 품격을 지키지 않은 후보를 여지없이 집으로 돌려보냈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라 그 사람의 말을 들으면 국민을 대의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정치인의 말은 무겁고, 품격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치인의 말에서 그 ‘품격’이란 게 사라졌다. 거친 말, 험한 말을 내뱉는 수준을 넘어 듣는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것은 아닐까 걱정될 때도 많았다.

적어도 이번 총선에선 그런 후보자들에겐 퇴출 명령이 내려졌다. 인천 연수을에 출마한 민경욱 미래통합당 후보가 대표적이다. 언론인 출신에 대변인까지 지낸 정치인이지만 그는 ‘막말 제조기’라는 오명을 달고 살았다. 이번 공천 과정에서 그간의 막말 논란으로 공천 배제 위기에 처했지만, 황교안 대표의 측근이라는 점이 작용했던 것인지 살아남아 통합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다. 정의당 이정미 후보까지 3자 구도로 선거가 치러지면서 당 안팎에선 그가 진보 표심의 분열 때문에 어부지리로 당선되리란 예측이 많았다. 하지만 초접전 끝에 민주당 정일영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정 후보는 당선 일성으로 “막말 정치 시대를 끝내고 품격 정치, 일하는 정치를 할 수 있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비단 민 후보뿐만 아니다. 강원 춘천·철원·화천·양구갑에서 3선에 도전한 김진태 후보도, 대전 동구의 이장우 후보도, 부산 남을에 출마한 이언주 후보도 모두 접전 끝에 패했다. 반복됐던 이들의 발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말들 뒤에는 온당치 못한 대중의 혐오에 기대려는 속내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왜곡된 혐오에 기대고, 그 혐오가 잘못 키워낸 분노를 자기 정치의 연료로 삼아왔다는 점이다.

이들의 낙선은 그래서 더 의미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20대 국회를 끝으로 더 이상 혐오에 기대는 말로 국민을 호도하는 정치인들을 두고 보지 않겠다는 유권자들의 통보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정치학자들은 21세기 민주주의의 위기를 다른 데서 찾지 않는다. 아무리 그 사회의 제도적 기반이 튼튼하다 해도 극단적인 선동과 혐오에 기생하는 정치인들에게서 위기의 실마리를 읽어낸다. 그런 정치인을 솎아내고 그들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보여줬다. 21대 국회 당선자들이 이 같은 민심을 소홀히 여기지 않기 바란다. 이번에 걸러내지 않은 정치인이 있다면, 그들을 견제하고 바꾸는 것은 국민만큼이나 정치인의 몫임을 말해두고 싶다. 혐오를 먹고사는 정치인이 소속 정당에서 주류 정치인으로 커 나가지 않도록 견제함으로써 정치의 품격을 지키라는 것이 유권자의 명령임을 잊지 않기 바란다.

김나래 정치부 차장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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