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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예배는 험한 세상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훈련의 자리



다시 돌아온 예배의 자리. 너무나 감격스럽다. 그러나 잃었던 예배를 다시 찾은 감격에만 젖어 있다면 우리는 진짜 중요한 것을 잃은 것이다. 새롭게 돌아온 예배 자리에서 우리는 예배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주일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늘 양식을 맛있게 만들어 먹는 소중한 자리다. 그러나 예배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매일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훈련의 자리이기도 하다.

특별히 다시 찾은 공예배에선 후자(後者)의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여기에 합리적 질문이 생긴다. 어떻게 그 짧은 예배 시간 가운데 ‘양식 먹음’과 ‘신앙 훈련’의 기능을 같이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짧은 예배시간이지만 그 안에 사도신경으로 드리는 신앙고백과 축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신앙 훈련 시간이다. 사도신경 속에는 신앙의 풍성한 유산이 담겨 있다.

사도신경은 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대로,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거룩한 지식을 내가 믿는 것이며 그 믿음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이다. 사도신경을 교회 안, 예배 시간 안, 그리고 입안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말고 세상으로 가져가도록 해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관점이 놀랍게도 짧은 사도신경에 정확히 담겨 있다. 그러므로 창조로부터 계획된 미래의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오늘의 세상에서 만난 고난을 넉넉히 이기도록 사도신경은 삶에서 함께해야 한다. 주일예배 가운데 신자의 관점 훈련을 하면서 확신 있는 생활까지 훈련하는 것이 사도신경 고백 시간이다.

축도는 어떤가. 단순히 예배를 끝내는 공식적 멘트인가. 아니다. 축도는 우리의 신앙을 예배 마지막에 담금질하여 그 뜨거운 하나님의 사람을 세상에 파송하는 자리다.

필자가 대학부를 지도할 때 이렇게 축도한 적이 있다. 청년들에게 강대상을 바라보지 말고 동서남북 세상의 네 방향을 향하라고 한 뒤에 축도했다. 세상은 저주로 가득 찼다. 절망의 세상이다. 미움의 세상이다. 상처의 세상이다. 마귀의 세상이다.

청년들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이제 이 축도를 안고 세상에 나가 저주를 끊고 축복으로 바꾸라.” 세상을 이길 하나님의 강한 군사로 훈련시키는 축도의 시간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동행으로, 짧지만 강하게 성도들을 무장하는 시간이 축도 시간이다. 삼위(三位)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을 이길 세상은 없다.

그렇다. ‘양식 먹음’과 함께 ‘신앙 훈련’이 이루어지는 곳이 예배이고 교회다. 교회가 만약 ‘양식 먹음’에만 집중하면 수동적이고 나약한 신앙인을 만들 것이다. 혹시라도 함께 모여 예배를 못 드리는 상황이 또다시 온다 해도 휘청거리지 말아야 한다. 견고해야 한다.

교회는 평소에도 물론이려니와 지금보다 더 극한 상황이 온다 해도 스스로 든든히 서 있도록 철저히 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담대히 이기는 ‘신앙 훈련’이 회복된 예배 가운데, 그리고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미국 퀸즈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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