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겨야 한다. 푹 잠겨야 한다. 예배는 말씀에 푹 잠겨야 한다. 예배는 성령에 푹 잠겨야 한다. 잠김이란 충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에는 진리에 잠김이 있어야 한다. 예배에는 성령이 충만해야 한다. 진리의 잠김이 없고 성령의 충만이 없다면, 일어나야 할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말씀대로 요단강 물에 몸을 일곱 번 잠그자 그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왕하 5:14)
예수님이 물에 잠기셨다가 나오실 때 성령이 임하셨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렸다.(마 3:16~17)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을 때 오순절 성령 충만은 그 충만을 받은 모든 자를 변화시켰다.(행 2:1~4) 진리의 잠김이 없는 예배, 성령의 충만이 없는 예배는 상상할 수 없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다반사다.
에스겔 47장을 보자. 성전 제단에서 나온 물이 발목을 적시다가 무릎에 이르고 허리까지 차오른 다음에는 능히 헤엄치지 못할 정도로 차오른다. 그리고 그 물결이 흘러가는 곳마다 엄청난 회복의 역사와 놀라운 생명력을 보인다. 말씀의 잠김, 성령의 충만이 아니고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해변에 가보라. 가장 시끄러운 사람들은 발목에 바닷물을 찰싹찰싹 적시며 뛰어다니는 자들이다. 무릎이나 허리에 물이 있는 자들은 제한적이긴 하나 나름 자기 폼을 잡는다. 푹 잠긴 자들은 아예 보이지도 않으니 떠들거나 무게 잡을 일이 없다. 푹 잠긴 자들은 놀랍고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 잠김은 놀라움을 지향한다. 충만은 변화를 일으킨다.
살짝 담그기만 했던 예배로 만족하지 말자. 예배 내용은 어떻든 예배가 끝나는 것에 가장 큰 기쁨을 보이는 신자들도 간혹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예배 가운데 푹 잠김이 없이 나오는 것을 거부하자. 하나님을 예배에서 만나고 나온 자는 마땅히 “깊도다 진리의 부요함이여, 넘치도다 성령의 충만함이여”라고 고백하며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성도라면, 우리가 교회라면 잠김을 맛보지 못하고 충만을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거룩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거룩한 불만과 무책임한 비판은 전혀 다르다. 거룩한 불만은 목회자에 대한 끝없는 판단, 여러 사람이나 교회의 많은 사역에 대한 한없는 비평이 아니다. 거룩한 불만이란 더 이상 잠김이 없는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회개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충만하지 못했던 것의 반복을 당연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리의 잠김에 대한 경험이 없었는데, 여태까지 성령의 충만에 대한 체험이 없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예배를 똑같이 맞이하려는 용기는 무엇인가. 잠김과 충만에 대한 비전이 없기 때문인가. 잠김과 충만의 방법을 모르는 까닭인가. 예배의 수심(水深)이 어느 정도이지 정직하게 헤아릴 필요가 있다.
너무 척박하다면 지금까지 이 지경으로 만든 낡은 방법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새로운 길이란 이전에 없던, 전혀 다른 길을 예배에서 찾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오랫동안 잊었던 기본을 다시 찾자는 것이다. 잊었던 기본 속에 잠김의 길이 있고 충만의 도(道)가 있다. 말씀을 전하고 전하면 말씀에 잠긴다. 주님만 높이고 높이면 충만에 이른다. 말씀만 전하는 예배, 주님만 높이는 예배의 자리로 향하자.
김성국 목사(미국 퀸즈장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