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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진정한 예배는 복음·거룩한 문화 함께해



예배는 복음을 진술하는 시간이다. 예배 가운데 복음을 들을 수 없다면 무엇을 위한 예배이겠는가. 복음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어마어마한 구원 이야기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에 복음이 진술되고 나타나는 순간마다 예배자들은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복음 가운데 용서의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죄인이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 받아 의롭다고 불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돼 하늘의 모든 유업을 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아무런 감동 없이 들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예배 가운데 엄숙한 예전(禮典)이 화려한 축제(祝祭)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복음은 예배 중에 예전의 틀에서 축제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예배에는 복음만 있는 게 아니다. 문화도 예배 곳곳에 잔뜩 스며있다. 복음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다. 예배 안에 있는 복음과 문화를 혼동하면 불필요한 논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강대상에서의 말씀은 불변의 복음이다. 강대상의 재질은 바꿀 수 있는 문화다. 찬양은 예배에서 절대로 제외시킬 수 없는 복음이다. 찬양의 스타일은 변화가 가능한 문화다. 성찬은 대치불가(代置不可) 복음이다. 성찬 중 사용되는 빵은 고정되지 않은 문화다.

우리는 처절한 문화 전쟁을 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 밖에서다. 기독교 문화는 하나님을 떠난 세속 문화와 싸움을 피할 수 없다. 문화의 목적은 분명하다. “문화는 자연을 상대로 한 인간 활동의 결과”라는 사전적 정의에서 문화의 목적을 다 찾을 수 없다.

문화란 인간의 활동 이전에 하나님의 명령이다.(창 1:27~28, 2:15) 문화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연을 깨우는 종교적 의무다. 그러므로 인간 중심의 세속 문화와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 문화 사이에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 안에서는 서로 싸울 필요가 없고 싸워서도 안 된다. 나와 찬양하는 스타일이 다른 사람이라고 ‘구원받은 사람 맞나’라고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을 뭘 모르는 저급한 크리스천으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양복을 입지 않은 젊은 설교자의 설교는 귀담아들을 필요조차 없는 연설일까. 아니다. 기독교 문화 안에서 세대 간의 차이(gap), 지역 간의 차이, 교단 간의 차이는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할 영역이지 반목하고 단절할 이유가 될 수 없다.

더 이상 예배 안에 있는 문화의 문제로 힘들어하지 말자. 하지만 예배 안에서의 기독교 문화는 그 시대의 하위(下位)문화에 짝해서는 결코 안 되고 상위(上位) 문화까지도 훌쩍 뛰어넘어야 한다는 점만은 잊지 말자. 가장 고상한 복음에 지극히 천박한 문화의 옷을 걸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직접 들어 보라.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 29:2)

진정한 예배에는 온전한 복음이 항상 존재하며 거룩한 문화가 늘 함께한다. 지금 잠시 뉴욕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으로 볼품없이 됐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의 뮤지컬 도시다. 하지만 세계인들이 와서 열광하는 세계적 뮤지컬이라 해도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니, 어설픈 장난 수준이다. 하나님이 직접 쓰신 온전한 복음과 믿음의 사람들이 순종으로 빚은 거룩한 문화가 조우(遭遇)해 예전과 축제로 표현되는 예배라는 진짜 드라마에 비교하면 말이다.

김성국 미국 퀸즈장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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