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델라를 기다렸다. 너무나 처절한 차별과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이유 없는 죽음의 슬픈 현실을 끝내고 자유를 가져다주리라 믿는 만델라를 그들은 기다렸다.
뮤지컬 영화 ‘사라피나’에서 흑인 학생들의 간절한 바람은 만델라가 오랫동안 투옥돼 있던 교도소에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자행됐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에 항거하던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를 본 지가 꽤 오래됐는데 요즘 다시 생각난다.
왜 그런가. 오늘의 미국에서 흑인들은 누구인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 사건이 얼마 전 백인 경찰에 의해 안타깝게 죽음에 이른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었다.
인종차별을 멈추라는 ‘시위’와 한인 이민자들도 피해를 많이 보는 ‘폭동’ 사이의 현장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도대체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여전히 만연한 인종차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가운데 ‘사라피나’가 떠올랐다.
그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다. 학생들과 선생님(우피 골드버그)이 함께 춤추며 불렀던 ‘주기도문’이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주기도문’은 인종차별에서 진정한 소망이 하나님을 우리 모두의 아버지로 고백하는 예배 가운데 있음을 다시 깨닫게 해줬다.
하나님은 모든 인종의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모든 만민의 왕이시다.(시 47:1~2) 예배는 우리 모두의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를 알고 기뻐하는 자리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왕이심은 복음 중의 복음이다.
그 왕에게 구원이 있고 돌봄이 있고 지킴이 있고 베풂이 있고 변치 않는 사랑과 다함 없는 은혜가 영원히 있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진정 기쁘지 않은가.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는 그 앞의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른다. 여기에 어떤 차별이 있겠는가. 큰 왕 앞에서 그 왕의 은혜로 부름 받고 그 왕의 사랑을 덧입고 사는 사람이 서로 차별하는 처사는 얼마나 가소로운 태도인가.
하나님은 성전 문을 닫을 자를 찾으셨다. 열린 성전 문으로 들어와 예배드리는 자들의 가증한 예배를 도무지 참으실 수 없었기 때문이셨다. 그때 하나님이 원하셨던 예배는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모든 민족이 함께 드리는 예배였다.(말 1:10~11)
예배는 인종차별을 불허한다. 모든 인종이 같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드리는 장엄한 하늘 예배를 보라.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계 7:9)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는 차별이 없다. 예배자는 누구나 동등하다. 아니 모든 예배자는 동등을 뛰어넘는(more than equal) 그 무엇을 공유해야 한다. 예배자가 모두 공유해야 할 그 무엇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인종차별은 싸움으로 철폐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이시요 영원한 왕으로 믿으며,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받은 존재요 서로 사랑할 존재로 인정하며 나아가는 예배에서 해결된다.
미국 퀸즈장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