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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무엇을 위해 아낌없이 시간을 쓰는가



비목(碑木)은 비장하게 흐른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가슴 먹먹한 노래이다.

이름 모를 깊은 계곡에 비목 하나 남기고 떠난 그들은 누구인가.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군인들이다. 6월은 그래서 마음이 저민다. 현충일과 6·25전쟁, 연평해전 등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위해 소중한 생명을 기꺼이 계곡에 묻고 바다에 던진 젊은 군인들을 기억하게 한다.

모든 아름다운 열매에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다. 열매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뿌리는 얼마든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라는 열매는 젊은 군인들의 어둠 속 뿌리 됨에 있다.

하늘과 땅에는 자유보다 더 멋진 열매가 있다. 예배다. 자유는 사람이 누리는 것이지만 예배는 하나님이 누리신다. 모든 열매가 그렇듯이 예배라는 열매도 어둠 속의 뿌리에서 기인한다.

어둠 속 뿌리는 어둠 속에 돌아가셨던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희생제물 되셨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예배가 가능하다. 예배에는 더 이상 희생제물이 필요 없지만 다른 차원의 희생이 요청된다. 그 희생은 예배드리는 자들의 몫이다. 예배드리는 자들이 지불할 희생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시간이 희생되어야 예배가 가능하다.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예배는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예배처럼 비생산적인 일에 더 이상 시간을 들이지 말라고 한다. 마르바 던은 ‘고귀한 시간 낭비 예배’(A Royal Waste of Time)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예배시간은 낭비하는 시간처럼 보이지만 그 시간은 결코 낭비의 시간이 아니며 오히려 시간을 가장 고상하게 사용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말이 맞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 중에는 정작 예배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는 듯싶으면 ‘이래서는 안 되는데’라는 표정에 잠기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시간을 아낌없이 쓴다. 그 사람이 어디에 시간을 많이 쓰는지를 알면 그 사람이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사랑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우리에게 쏟아부으신다.

예배는 시간을 희생해 영원을 만나는 사건이다. 전도서 3장은 시간에 관한 이야기로 출발한다. 그 모든 시간은 영원을 향해 달려간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1) 모든 시간이 영원을 사모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예배의 시간이 영원을 지향한다는 말에 무슨 변증이 더 필요하겠는가.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된다. 예배는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기도 하고 미래의 소망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배가 희생을 요구하는 시간은 현재, 바로 지금의 시간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이때’ 곧 오늘, 지금, 현재의 예배자다.(요 4:23)

예배가 시간의 희생을 요구하는데 그 시간은 다름 아닌 ‘지금’이다. 예배의 부름에 조금도 머뭇거리지 말자.

김성국 목사(미국 퀸즈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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