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도 몸살을 앓는다. 나무를 옮겨 심으면 새로운 땅에 적응하기까지 큰 진통을 겪는다. 태평양을 배로 건너보았는가. 비행기도 힘든데, 배로 이동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몸살과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에 첫발을 디딘 언더우드 선교사다. 그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된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선교는 이렇듯 숱한 장애물을 건너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조선 땅에서 만난 어둠과 무지 때문에 그의 기도는 탄식처럼 이어지다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잖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그가 태평양을 건너는 위험을 불사하고 선교하려 했던 목적은 조선의 무지한 자들로 하나님께 예배케 하려는 것이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선교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한다.”
맞는 말이다. 선교의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선교는 구제사업도, 정의구현도, 교회성장도, 아니 그 어떤 것도 목표가 될 수 없다. 방심하는 사이에 선교는 세속화될 수 있다. 선교는 오직 구원을 지향하며 그 최후목적은 예배다.
아름다운 선교로 거둔 구원의 진정성은 참된 예배로 화려한 꽃을 피워야 한다. 참된 예배자가 세상을 바꾼다.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 사이에 있었던 영생의 이야기가 예배의 이야기로 전개되고 그 여인이 살던 마을을 변화시킨 이야기는 언제나 어디서나 적실하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전도자들이 전한 복음으로 구원받고 날마다 모여 예배드렸을 때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는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돼야 할 말씀이다.
왜 진정한 예배자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의 칭송을 받는가. 예배자들은 자기들처럼 세상이 열심히 추구하는 것에서 자유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에 있는 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 선교본부를 방문한 목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다. 그곳 지하창고에 유명한 물건이 있다는 이야기를 미리 듣고 안내하는 분에게 그 창고를 구경시켜 달라고 하셨단다. 마침내 그 창고에 가보니 수많은 가방이 보관돼 있었다.
가방은 WEC에서 파송돼 세계 각지로 흩어진 선교사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가방을 그곳에 맡겨놓고 다시는 찾으러 오지 않았다. 선교현장에서 바로 하늘나라로 갔기 때문이다. 그 설명을 들으시면서 목사님의 가슴이 미어졌다고 한다.
그들은 이 세상 ‘가방’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우선이 아니었다. 예배가 없던 곳에 예배를, 틀린 예배가 있던 곳에 바른 예배를 드리게 하려는 선교에서 가방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웠으리라. 가방을 두고 떠난 그들은 지금 하늘에서 무엇을 할까. 선교지에서처럼 예배를 드리리라.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여전히 이 세상의 가방을 붙잡느라 선교의 길을 떠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래서 예배를 세우는 일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
김성국 미국 퀸즈장로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