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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기



‘인재일록(忍齋日錄)’은 조선 중기 충남 덕산의 선비 조극선(趙克善·1595~1658)의 일기다. 15세부터 29세까지 14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날의 일과와 감상을 꼼꼼히 적었다. 행여 일기를 쓰지 못한 날이 있으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채워넣었다. 14년치가 쌓였으니 조선시대 시골 선비의 일상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다. 흔치 않은 자료다. 대부분은 평범한 일상의 기록이다. 오늘은 어딜 가서 누굴 만났는지, 무슨 물건을 주고받았는지, 어떤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따위다. 남이 볼 일이 없다고 여겨서인지 속내를 솔직히 드러냈다. 자신의 치부, 가족 간의 갈등, 지역사회의 부조리도 숨기지 않았다. 시골 선비의 한가로운 생활을 기대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그렇지 않다.

조극선의 하루는 나름 바쁘다. 여느 선비와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일은 제사 지내기와 손님맞이다. 제사는 왜 그렇게 자주 돌아오고 손님은 왜 그렇게 많이 찾아오는지. 이웃과 친지를 통해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는 이른바 ‘선물경제’의 실상도 자세하다. 주고받은 물건은 종이 한 장, 생선 한 마리까지 빠짐없이 기록했다. 덕택에 조극선의 살림살이는 숟가락 개수까지 훤히 들여다보인다.

식생활도 엿볼 수 있다. 상에 올라온 반찬은 주로 생선이나 젓갈이었다. 고기는 가끔 먹었는데, 의외로 쇠고기를 자주 먹었다. 술은 매일처럼 마셨다. 취해 쓰러진 적도 많은데, 고단해서 그랬을 것이다. 농사 짓고 누에 치기 바빠 공부를 거르는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다. 조선 선비는 고담준론이나 일삼는 한가로운 존재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생활인이었다.

때로는 평온한 일상을 흔드는 사건도 일어난다. 전염병도 그중 하나다. 전염병이 돌 때마다 조극선은 가족을 데리고 이리저리 피해다녔다. 하지만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친척과 노비를 합쳐 십여 명을 전염병으로 잃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가는 모습은 옆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환자는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데 기껏 불러온 의원도 손쓸 방법이 없어 포기하고 돌아간다. 남은 가족들은 밤새 옆방에서 들려오는 환자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는다. 문득 조용해져 살펴보면 환자는 숨이 끊어져 있다. 제대로 장례를 치를 상황이 못 되니 대충 염습해서 가까운 곳에 임시로 묻어둔다.

세 살짜리 아들 조천석의 죽음은 끔찍해서 차마 읽기 어려울 정도다. 조극선은 외출했다가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왔다. 조극선의 아버지가 죽은 손자를 무릎에 눕혀놓고 행여 살아날까 기다리고 있었다. 조극선은 아들의 몸을 더듬었다. 죽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었다. 이튿날 조극선은 아들의 시신을 먼저 돌아가신 어머니 무덤 옆에 묻었다. 두 달 뒤에는 하나뿐인 아우를 잃었다.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데다 전염을 꺼리는 이웃의 눈이 두려워 목놓아 울지도 못했다. 슬픔을 참을 수 없을 때마다 근처의 솔숲으로 들어가 통곡하고 돌아왔다. 비극이 반복되는 와중에도 일상은 계속됐다. 농부들은 계속 농사를 짓고 선비들은 계속 책을 읽었다. 조극선도 눈물을 훔치며 공동체의 끈끈한 결속에 기대어 일상을 되찾으려 애썼다. 그들은 전염병의 종식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빈번히 유행하고 잦아드는 전염병은 일상을 파괴하는 괴물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였다.

첫 번째 확진자가 발생한 지 반년이 지나도록 코로나19 사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뉴 노멀’이니 ‘포스트 코로나’ 시대니 하는 현란한 수사는 필요없다. 우리는 전염병 앞에 무력했던 과거로 돌아간 것뿐이다. 질병 정복의 꿈은 인간의 오만에 불과했다. 자포자기는 아니다. 병과 싸워 이기려는 노력은 계속해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병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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