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장식 (10) 신학에 대한 열망에… 교사생활 접고 조선신학교로

1950년 4월 6일에 찍은 조선신학대학 학부 1회 졸업생 기념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장식 교수.


1년간의 계성중학교 교사생활은 보람도 있고 즐거웠다. 그러나 신학공부에 대한 열망이 계속 내 마음 속에 피어올랐다. 해방 직후였던 1947년에 대학은 몇 군데 되지 않았다. 남한에서 신학을 할 수 있는 곳은 연세대 신학과와 조선신학교, 감리교신학교, 성결교신학교 정도였다.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데 밀양에서 알고 지내던 윤술용 목사님이 나를 서울역전 동자동에 있던 조선신학교 교장 송창근 박사님께 소개해 줬다. 입학시험이 이미 끝난 시점이었다. 9월 학기 수업도 진행 중이었으나 난 무시험으로 조선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조선신학교는 남한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유일한 교단 신학교였다. 그러나 경영은 대단히 어려웠다. 해방 된 때였지만 미국장로교 선교부로부터나 교단으로부터도 원조가 없었다. 다만 캐나다연합교회가 약간의 원조를 했을 뿐이었다. 신학교 건물 역시 일제강점기 때 천리교 본부로 사용했던 건물로 상당히 낡아 있었다. 신학교로 쓰기에 공간 자체도 협소했다.

조선신학교에는 4년제 학부와 3년제 전문부, 그리고 3년제 사회사업부가 있었다. 신학교 인근 저동에 부설 여자신학교도 있었다. 여자신학교 옆 건물에 영락교회를 세워 목회를 하셨던 한경직 목사님께서 여자신학교를 맡아 운영하셨다. 한 목사님은 조선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시기도 했다.

난 입학하자마자 교무과 근로 장학생이 돼 수업료도 면제 받았다. 수업을 마치면 교무실로 와 학적부 정리하는 일을 했다. 일이 꽤 복잡했지만 이곳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김재준 목사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학교 도서 정리도 내 몫이었다. 교무실 작은 책장에 100권이 채 안 되는 신학서적이 꽂혀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분류해서 번호를 매기고 도서대장을 장만해서 책 목록을 만들었다. 신학교 도서대장 제 1권이었다. 도서 분실을 막기 위해 모든 책 51쪽 안에 ‘조선신학교 도서’라는 큰 도장을 찍었는데, 오늘날 한신대 도서관 안의 모든 책 51쪽에도 이런 도장이 찍혀 있다.

한번은 송 박사님이 내게 영어로 된 신학서적 두 권을 주면서 번역해 오라고 했다. 한 권은 프린스턴 신학교의 실천신학 교수였던 헨리 S. 코핀이 쓴 설교학 서적이었고, 다른 한 권은 영국성공회 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이 쓴 교회학 서적이었다. 겨울방학을 앞둔 때였는데 나는 밀양 본가로 가서 3개월간의 방학기간 동안 두문불출하며 번역을 끝냈다.

나는 송 박사님으로부터 번역이 어떻다는 말씀은 듣지 못했다. 다만 어느 날 교수회에서 나를 학부 2학년으로 월반하도록 결정했다고 알려주셨다. 당시 조선신학교 학부 2학년에는 7명의 재학생이 있었다. 문교부로부터 신학교가 정규대학으로 승격을 허가 받은 건 47년도였지만 학부생은 그 전년부터 모집했었다. 월반으로 인해 나는 이들과 함께 50년 4월 조선신학대학(문교부 인가 후 개편) 학부 제1회 졸업생이 될 수 있었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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