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장식 (12) 두 신학교 사이 깊어진 골 결국 메우지 못하고 갈라서

한국전쟁 직전 조선신학대학 이사장 함태영 목사가 말씀을 전하는 모습. 왼쪽부터 이장식 교수, 김재준 목사, 최윤관 목사, 송창근 목사.


내가 조선신학대학(현 한신대) 4학년이던 1949년 장로교 총회는 우리 학교와 장로회신학교 사이 깊어진 골을 메우려 애를 썼다. 두 신학교 합동 위원회를 조직해 절충을 시도했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차는 확연히 달랐다. 조선신학대학 측은 양교의 무조건적인 합동을 내세웠다. 반면 장로회신학교 측은 김재준 교수님의 사퇴와 중요 신학 과목을 선교사들에게 맡기자는 조건을 고집했다. 결국 양교 합동은 좌초됐다. 6·25 전란이 목전에 임박해 있었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사람이었다.

장로교 총회는 51년 서로 교육하는 신학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신학교로 인해 발생하는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새로운 제안을 한다. 두 신학교 직영을 전부 취소하고 대신 총회 직영의 새로운 신학교 총신대를 대구에 만들자고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총회에서 내놓은 안이 조선신학대학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들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이즈음 조선신학대학은 한국신학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 교단 내 두 학교의 아슬아슬한 동거는 1953년 제38회 총회에서 끝이 났다. 당시 장로교 총회는 총대들의 투표를 통해 김 교수님의 목사 면직 처분을 확정했다. 또한 한국신학대학 졸업생들에게 교역자 자격부여 금지 결정을 내려 목사가 될 수 없도록 했다.

처참한 결과에 한국신학대학 측 총대들은 일제히 퇴장했다. 이후 한국신학대학 측은 별도의 장로교 총회 소집을 준비했고, 바로 그해 한국장로교회 개혁을 기치로 내건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를 출범시켰다.

난 이때 한국신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총회에 참석한 총대들의 얘길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결정은 종교적 인해전술에 따른 것이었다.

1951년 1·4후퇴 당시 북한에 남아 있던 많은 장로교 목사가 월남했는데, 이들 중 67명이 정식 총대로 영입돼 38회 총회에 투표권자로 앉아 있었다. 이는 소위 근본주의 신학을 따르는 이들의 꼼수였다. 월남한 목사들은 노회가 이북에 있었다. 고로 남한 장로교 총회 총대 자격이 없는 분들이었다. 만일 이 목사들의 투표가 없었더라면 그 결의는 통과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 표 차이는 8표에 불과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이때를 되돌아보니 안타까운 마음만 들뿐이다. 장로교에 뿌리를 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이 2016년 9월 63년 만에 김 교수님께 내려진 목사 제명 결의를 철회하는 걸 보면서 무엇이 우리를 갈라지게 했나 회의감도 들었다.

한국의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다님에 있어 교파나 교단을 따지지 않는다. 부모가 다니는 교회를 계속해 다니거나 친구 따라, 혹은 집 근처 가까운 교회를 간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에 들어가서는 자기네 교파가, 자기네 교단이 제일이라 주장하며 싸운다. 교회가 세상 나라처럼 된 것이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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