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장식 (13) 졸업 후 모교서 강사 재직… 2개월 만에 한국전쟁

1950년 6월 28일 폭파로 파괴되지 않은 한강교를 그해 7월 8일 미 공군이 폭격하는 장면.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1950년 4월 조선신학대학(현 한신대)을 졸업한 난 계속해서 학교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교수회 결정이었는데 교수님들은 나를 교수로 키우고자 하셨다. 난 교무과 일을 하면서 신학부에서 영어 고등문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저동에 있는 여자신학교에서 서양문화사를 가르쳤다.

당시 신학교는 교수 직급이 제도적으로 제정된 때가 아니었다. 때문에 내 직책이나 직급이 따로 있진 않았지만, 오늘날 제도에 비춰볼 때 전임강사에 해당했다. 아무튼 내 한신대 재직 경력은 이때부터 계산돼야 할 것이다.

그해 신입생들이 입학해서 겨우 두 달 정도 공부했을 무렵인 6월 25일 주일 아침, 나는 조선호텔 앞에 있던 상공회의소 건물에 있었다. 당시 이곳에선 군인교회가 예배를 드렸는데 이날 설교를 내가 맡았다.

그런데 예배시간이 다 됐는데도 그날 사회를 맡은 장교가 나타나지 않았다. 교인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거기 모인 장병들과 사병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30분 정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다른 분이 대신해 사회를 보고 예배를 드렸다.

내가 설교하고 있었을 때 북한 공산군은 이미 동두천 근처까지 탱크를 몰고 들어와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군데군데 서있는 헌병들을 봤다. 이들은 휴가를 얻어 서울 시내를 오가던 군인들에게 빨리 귀대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난 그들이 저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학교 근처 하숙집에 도착해서야 주인 아주머니가 공산군의 남침을 알려줬다.

서울 시민들은 북한의 남침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또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 전쟁이 될지도 몰랐기에 조금 지켜보자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오후가 되자 많은 사람들이 서울역전에서 한강으로 가는 전찻길을 따라 피란을 떠났다. 궂은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이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이들 대부분은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로 북한 공산주의 정치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튿날 학교에 갔더니 등교한 학생들의 불안감이 상당했다. 수업 진행이 안 될 정도였다. 학교를 나와서 서울역전 거리를 내다봤더니 북쪽에서 수많은 탱크 행렬이 노도처럼 무섭게 밀려오고 있었다. 서울 거리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탱크 주변 인민군 곁에서 만세를 부르며 기뻐 걸어가는 무리가 있긴 했다. 자세히 보니 죄수복 차림이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인민군에 의해 풀려 나온 사람들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다. 대한민국 군대는 서울시 파괴 및 인명 피해 방지를 이유로 시가전 없이 한강 저쪽에서 저항을 시도한다 했지만, 실은 서울을 수호할 힘이 없었다. 국군이 예고도 없이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인민군의 진격 저지를 시도했다. 그러나 저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새벽 미명에 자동차를 몰고 한강을 넘으려던 수많은 시민들이 그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

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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