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 ‘생명 진리 은혜 되신’ 462장(통 517)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요나 3장 1~4절
말씀 : 요나서에서 하나님은 요나를 깨우쳐 주기 위해 여러 수단을 동원합니다. 바다에 풍랑을 일으키기도 하고, 큰 물고기를 준비해 요나를 삼키게 하기도 하고, 박 넝쿨이 자라 시원한 그늘이 되게 하기도 하고, 조그만 벌레가 박 넝쿨을 갉아 먹게도 하고, 뜨거운 동풍이 불어오게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름입니다. 요나서를 읽다가 요나의 이름과 니느웨의 이름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혹시 두 이름이 똑같은 것은 아닐까요. 히브리어로 확인해 보았더니 역시나 예감이 맞아떨어졌습니다. 히브리어는 본래 모음이 없고 자음만 있었습니다. 자음을 살펴보면 요나는 ‘요드 봐브 눈 헤’로 되어 있고, 니느웨는 ‘눈 요드 눈봐브 헤’로 되어 있습니다. 자음의 철자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한글로 설명하면 요나는 ‘ㅇㄴ’으로 되어 있고, 니느웨는 ‘ㄴㄴㅇ’으로 되어 있지요. 요나와 니느웨의 이름에서 뼈대를 추려 맞춰보니까 윷짝 맞듯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이고 니느웨가 요나입니다. 요나와 니느웨는 따로가 아니고 한 몸입니다. 하나님이 니느웨성에 호세아나 이사야가 아니고 굳이 요나를 보낸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이름을 통해 요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요나야, 네 이름과 니느웨의 이름이 똑같은 것처럼 너와 니느웨는 하나다.” 이걸 깨닫고 난 후에 저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요나는 이 사실을 알았을까요. 요나가 이걸 알았더라면 하나님이 명령을 내렸을 때 니느웨에 가지 않으려고 그렇게 고집을 피우지 않았을 것이고,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다시 니느웨성에 갔을 때 걸어서 사흘 길이나 되는 성읍을 겨우 한나절 다니면서 건성으로 설교하지 않았을 것이고,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했을 때 심사가 뒤틀려 하나님께 화를 내고 성읍 밖으로 나가 초막을 짓고 구경하는 일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팔짱 끼고 구경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자기가 사는 동네에 산사태가 나서 발칵 뒤집혔는데 해외여행을 간다고 나서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자기 자식이 사고가 나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한가롭게 낮잠이나 자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마농의 샘’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은 보기 싫은 척추옆굽음증 장애인 청년을 지독하게 괴롭히고 못살게 굴어서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척추옆굽음증 장애인 청년은 자기의 유일한 아들이었습니다.
내가 가장 미워하는 원수가 나와 한 몸이라면, 나와 가장 먼 사람이 나와 한 몸이라면 다른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이 없겠지요. ‘요나와 니느웨는 한 몸이다.’ 요나가 이 말을 들었더라면 과연 진심으로 수긍했을까요.
기도 : 하나님, 모든 사람을 제 몸처럼 사랑하게 믿음을 더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오종윤 목사(군산 대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