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 ‘예수 더 알기 원하네’ 453장(통506)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호세아 6장 1∼3절
말씀 : 진리에는 이론적 진리와 생명적 진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론적 진리는 ‘3+4=7’과 같은 수학적 진리 같은 것입니다. 알면 편하고 모르면 불편한 정도입니다. 그러나 생명적 진리는 편하고 불편하고를 넘어 생명이 달린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군에 입대했는데 복무하는 곳에서 적과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자식이 살아 있을지, 전사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들을 보낸 부모는 생명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것이 생명적 진리입니다. 생명적 진리는 죽느냐, 사느냐가 걸려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생명적 진리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이스라엘은 화려하고 풍요로웠습니다. 충분히 먹고살 만했습니다. 솔로몬 왕 이후 가장 괄목할 만한 정치적,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생명적 진리에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거짓 진리와 거짓 우상에 취해 있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향해 선지자는 여호와를 힘써 알아야 한다고 전합니다. 그들은 화려한 번영에 중독된 나머지 생명의 소식을 귓등으로 들었습니다. 그 결과 영적으로도 소생하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지자의 외침을 목숨이 걸린 진리로 귀담아듣고 마음에 담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은 찢으시기도 하시지만 도로 낫게도 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치시기도 하지만 다시 싸매시기도 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로 낫게 해주실 것을 왜 찢으실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징계를 하기 위함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기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징계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징계를 받지 않는다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라고 하십니다(히 12:6∼7). 둘째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사탄에게 맡겨서 그 인생을 찢으시고 치셨습니다. 욥은 그 험한 과정을 거친 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하나님에 대해서 백 번 듣는 것보다 직접 한번 눈으로 보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은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을까’라고 찬송하며 하나님을 뵈옵는 것을 소원하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으로는 근심되는 일, 밖으로는 곤란한 일을 겪고 계시나요.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친아들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배우고 아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남길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입니다.
기도 : 고난과 고통의 시기에 하나님을 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김광석 목사(기쁨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