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순흥 (4) “신앙이 공부보다 우선”… 고3 시험기간에도 예배

장순흥(왼쪽 네 번째) 한동대 총장이 1971년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 교정에서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했다.


1970년대만 해도 교회 주보는 ‘가리방’이라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요즘이야 컴퓨터로 작업해 손쉽게 출력하지만, 그때는 등사판을 롤러로 밀어서 한 장 한 장 만들었다. 철필로 등사지 위에 글씨를 쓰고 고무 롤러에 잉크를 묻혀 등사지를 누르면 등사지 아래 있는 종이에 글씨가 새겨졌다. 매주 토요일 아이들에게 수학 문제 풀이방법을 가르쳐주고 같이 주보를 만들었다.

서울 경복고 안에서도 왕성하게 전도 활동을 펼쳤다. 대표적인 전도대상자는 강윤식 기쁨병원 원장이었다. 강 원장은 한 학년 후배였는데, 성실하고 착했기에 눈에 띄었다. “윤식아, 너 일요일에 뭐하니.” “네, 장 선배. 이번 주에는 특별한 일 없어요.” “그래, 그럼 나랑 덕수교회에 좀 가자.” “교회에요?”

교회 문지방을 넘어본 적이 없는 강 원장은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지,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학생회장을 그에게 물려줄 정도였다. 강 원장은 훗날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90년대 국내 최초로 대장 항문질환 전문병원을 개원했다. 운영난을 겪던 서울모테트합창단의 전폭적인 후원자가 되어 병원에 연습홀을 마련해 줄 정도였다. 그는 세계선교사대회에도 큰 기여를 했다.

고3 때도 전도는 계속되었고 대학입시라는 커다란 인생의 터널이 있었지만, 수요예배와 토요일, 주일 고등부 예배를 위해 교회에서 보냈다. 시험 준비로 바쁜 수험생이 일주일에 3일을 교회에서 보낸 것이다.

이때는 ‘신앙이 공부보다 차원이 높다. 신앙 다음이 공부다’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시험이 내일인데 교회에 가야 하나. 나의 신앙은…’이라는 선택적 시험에 빠질 때 믿음의 질서는 흐트러지고 갈등은 생기게 된다. 나에게 신앙이 공부보다 우선한다는 공식이 생기고 난 후부터는 어떠한 불안감도 존재하지 않았고 갈등도 생기지 않았다.

일찌감치 대학은 서울대, 학과는 원자력공학과로 목표를 잡았다. 이유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 때문이다. “한국은 석유, 천연가스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에너지가 부족하다 보니 겨울마다 사람들이 땔감을 확보하느라 산에 가서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냈고 그만 민둥산이 되고 말았다.” ‘아, 에너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구나. 나중에 한국의 에너지 확보에 기여하는 인물이 되고 싶다.’

당시 입시제도는 학력고사로 기본 학력을 인정받고 대학마다 본고사로 합격자를 가렸다. 서울대는 본고사로 국어 영어 수학 과학을 봤다. 수학은 두 학년 위의 누나 숙제를 봐주다가 실력이 부쩍 늘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영어는 교회 친구들과 영어성경으로 공부했기에 실력이 어느 정도 됐다. 과학은 원래 재미가 있었고 국어는 어느 정도 했다.

당시만 해도 경복고는 매년 300여명을 서울대에 보냈다. 한 반에 20여명의 합격자가 나올 정도였다. 내신의 비중이 높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의대보다 공대의 점수가 높던 시절이다 보니 전자공학과와 기계공학과, 원자력공학과의 점수가 높았다. 나는 주님 주신 훈련을 잘 통과한 덕에 72년 서울대 원자력공학과에 입학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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