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순흥 (5) ‘복음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 학업과 복음 전도에 최선

장순흥(오른쪽) 한동대 총장이 1977년 예수전도단에서 전도활동을 함께한 이상업 목사와 함께 야외로 향하고 있다.


당시 서울대 공과대는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었다. 지금의 서울과학기술대 자리다. 1972년 대학 입학 후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짓기 시작했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지만 창조주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주셨습니다. 성경은 그분을 믿는 자마다 영생과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그분을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서울 덕수교회 대학부 회장을 맡으면서 학업과 복음 전도에 최선을 다했다. 청년회 회장도 맡았는데, 담당 교역자가 없어서 대신 말씀을 전하기도 했다.

복음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누가 돈을 준다고 해봤자 기껏해야 몇백억, 몇천억은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은 줄 수 없었다. ‘그래,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저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닿는 대로 힘써 전하자.’

나의 복음 전도 활동에 기름을 부은 사람은 서울대 1년 선배인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이었다. 우리 부모님과 김 회장 부모님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평소 신앙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대학에서 김 회장과 동생 김성주 회장을 직접 만나보니 깊이가 남달랐다.

“순흥아, 예수전도단 모임이 있는데 한번 가볼래?” “예수전도단이 뭔데요.” 당시 예수전도단은 서울 명동성당 근처 YWCA 건물 지하에서 모임을 했다. 수도권에서 모인 청년 1500여명이 한자리에 모여 주님을 높였다.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합시다.” “이날은 이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속에 내 마음속에 내 마음속에.” 1970년대 한국교회를 휩쓴 복음성가는 그곳에서 나왔다. 청년들로 꽉 찬 그곳은 정말 복음의 용광로였다.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는데, 오정현 사랑의교회 목사도 그곳에서 내수동교회 청년 리더로 참여했다.

모임의 설교는 데이비드 로스(오대원) 목사님과 예수원 설립자인 대천덕 신부가 했다. 전체 모임 리더는 현재 케냐 선교사로 활동하는 임종표 선교사님이 했다. 임 선교사님은 25세이던 1973년 한국예수전도단을 세웠다. 여섯 살 차이가 나는 임 선교사님은 복음 전도의 열정이 대단했고 일 처리에 탁월했다.

그 시절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실력을 갖출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서 실력을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병역 의무를 마쳐야 유학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신체검사부터 받았다. 그런데 한쪽 눈이 아주 나빠 방위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부친이 현직 장성이라는 이유로 깐깐하게 다시 정밀검사를 했고 오히려 병역면제 판정이 나왔다.

1976~77년은 토플시험 준비, 서류 발급 등 미국 유학 절차를 밟느라 한창 바쁠 때였다. 하지만 전도 여행 등 예수전도단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한 번뿐인 젊음을 주님께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리=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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