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순흥 (6) “한국 원자력 발전에 이바지하겠다”… 미국 유학길

장순흥(뒷줄 오른쪽) 한동대 총장이 1977년 미국 MIT 대학원 재학 시절 보스톤한인교회에서 청년들과 함께했다. 당시 장 총장은 청년 회장으로 활동하며 복음전도에 힘썼다.


서울대 원자력공학과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늘 떠올랐던 생각이 있다. ‘한국은 원자력과 관련된 물리학 및 기초이론 과목은 잘 가르쳤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 설계를 위한 공학 및 설계 관련된 경험자가 거의 전무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미국 도움을 받아 원자력 발전소 시공만 하는 걸음마 단계에 있었다. 1971년부터 미국 웨스팅하우스에서 개발한 가압 경수로형 원자력 발전소를 부산 기장에 짓던 시절이다. 고리 1호기는 1978년 완공됐다. 아시아에서 두 번째, 세계에서 21번째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미국의 선진적인 원자로 설계 기술을 습득해 한국이 기술자립을 이루도록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러던 중 미국 대학에 원서를 보내게 됐다. 그리고 예수전도단 활동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다.

어느 날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MIT였다. ‘미스터 장, 축하합니다. 당신의 입학을 허락합니다. 연구장학생 후보로 선정되었습니다.’ 얼떨떨했다. 사실 MIT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7~8년간 한국인 유학생을 일절 받지 않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란 정부가 MIT에 큰 기부를 했다는 이유로 이란 출신의 유학생들에게 기회를 주다 보니 아시아계 유학생에겐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원서를 낸 77년 갑자기 입학 허가가 난 것이다. 게다가 장학생까지 됐다.

‘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나라를 위해 복음 전도에 힘썼더니 이런 복을 주시는구나. 말씀대로 주님께서 정말 삶을 책임져 주시는구나.’

맨 먼저 축하해준 분은 아버지다. “순흥아, 미국의 좋은 학교에 합격했구나. 축하한다. 지금껏 잘 해왔듯 앞으로도 잘하리라 믿는다.” 아버지는 미국 유학 경험이 있기에 MIT의 명성을 익히 알고 계셨다. 어머니는 아들을 먼 타지에 보낸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기뻐하시면서도 이내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어머니, 미국에 가서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박사가 되어서 한국 원자력 발전에 기여하는 인재가 되겠습니다.”

유학 준비를 마치고 그해 가을 김포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하니 유학을 간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하나님이 나에게 아주 좋은 기회를 주셨다. 미국에 가서도 복음전도에 힘쓰겠다.’

미국 보스턴에 정착했다. 교회는 보스톤한인교회로 정하고 한국에서 하듯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한인교회에는 청년부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이 유학 온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청년부를 만들었고 나는 회장을 맡게 되었다. 대부분 유학생이라 다들 형편이 어려웠다. 나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전도를 위해선 차가 필요했다. 그래서 중고로 크라이슬러 닷지 승합차를 사서 매주 6~7명을 태우고 교회로 향했다.

미국의 신앙생활도 한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 전도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유학생 전도에 주력했다. 매주 주말 전도에 힘쓰다 보니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가장 중요한 전공필수 과목의 첫 번째 중간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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