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순흥 (10) 스물여덟에 카이스트 부임… 원자력 기술 자립에 몰두

장순흥(앞줄 가운데) 한동대 총장이 1982년 서울 공릉동 카이스트 연구실에서 원자력공학과 석사과정 학생들과 함께했다. 조원진 박사, 최종호 국제원자력기구 전문가, 백원필 차기 한국원자력학회장, 김명기 원자력기술사, 나기용 두산중공업 원자력BG장(뒷줄 왼쪽부터).


카이스트는 1982년 3월 원자력공학과(현재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학생을 처음으로 뽑았다. 나는 그해 7월 귀국해 28세에 교수로 강단에 섰는데, 연구원 과정에는 나보다 나이 많은 학생이 꽤 있었다. 당시 교수는 먼저 부임하신 전문헌 교수님과 단둘이었다. 학과의 목표를 원전 기술 자립에 두고 인재 양성과 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췄다.

나는 원전 설계 수업을 맡았는데 한국형 원자로 설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선 원자력 기계공학, 원자력 전기공학, 원자력 화학공학이 바로 서야 했다. 특히 원자력 안전도 중요했다. 그래서 안전 규제에도 굉장히 신경 썼다. 원자력 안전교육과 연구를 통해 설계 인력과 규제 인력을 동시에 양성하는 그런 연구실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때부터 연구원들과 함께 한국형 경수로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필순 한국에너지연구소 대덕공학센터장과 자주 대화를 나눴다. 한 센터장은 이북 출신으로 공군사관학교와 서울대 문리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대 석사, 캘리포니아대 박사를 거쳐 70년대부터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무기 국산화 사업에 참여했던 석학이다.

그분은 내가 카이스트에 부임하던 해에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전신인 한국에너지연구소에 부임했다. 원자력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기술 자립에 대한 의지가 굉장히 강했다. 내 수업에 와서 가끔 청강도 하고 수업을 마친 뒤 점심을 하며 대화도 많이 나눴다.

“센터장님, 한국이 강대국이 되려면 반드시 원전기술 자립을 이뤄야 합니다. 우리 기술로 원자력 발전소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장 교수님, 어떻게 그렇게 젊은 나이에 원자력 기술 자립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소.” “노심 계통설계와 핵연료 설계만 잘하면 한국은 자립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원자로 계통 설계나 핵연료 설계를 할 수 있는 곳은 한국에너지연구소뿐입니다.”

한 센터장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줬다. 당시 한국에너지연구소가 원자력 발전소 개발 사업을 벌이는 것에 주변의 반대가 컸다. 산업부와 한국전력은 기술 자립보다 미국 웨스팅하우스사와 의존적 관계에 머물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한 센터장은 반대를 무릅쓰고 원자로 계통 설계와 핵연료, 노심 설계 기술 개발 사업을 수주했다. 나도 기술 자문을 통해 귀국 전부터 꿈꾸던 원전 설계 기술 자립을 위해 도왔다. 당시는 국내 원자력공학과에서 배출하는 박사는 5명밖에 되지 않던 시절이다. 카이스트는 1년에 10명씩 박사 과정을 선발했으니, 원자력 분야의 많은 인재가 카이스트로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카이스트에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의 기술 자립에 힘쓰면서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정답은 간단했다. 지식을 전달하는 교수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복음 전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90년 카이스트가 대전으로 이전한 후에는 매주 금요일 기독 학생 20~30여명과 함께 대전역을 나갔다. 전도지와 도시락을 나눠주며 복음을 전했다. 그때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만났던 과학자가 있었다. 원자력안전기술원 초대 원장이셨던 이상훈 박사님이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