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순흥 (11) 미국서 배운 원전 기술, 석박사 과정 수업에 녹여내

장순흥(앞줄 왼쪽 다섯 번째) 한동대 총장이 1983년 서울 근교에서 카이스트 원자력공학과 학과 창설 교수인 전문헌(앞줄 왼쪽 여섯 번째) 교수, 석사과정 학생들과 야유회를 갖고 기념 사진을 촬영했다.


원자력안전기술원 초대원장이었던 이상훈 박사님은 국내 원자력 안전 규제의 기틀을 놓은 분이다. 한국은 원자력 발전소 영광 3, 4호기(현 한빛 3, 4호기) 건설을 계기로 원전 설계, 제작, 건설 기술에서 자립했다. 안전 규제 수준도 국제적 수준이 됐다. 이때 원자력 안전 규제 기준을 만들다시피 한 분이 이 박사님이었다.

카이스트 원자력공학과 교수로 있을 때 나는 매주 월요일 오후면 이 박사님을 만났다. 그는 원자력의 생산 및 이용에 따른 재해로부터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1990년 설립된 원자력 안전 규제 전문기관의 수장이었다. 이 박사님은 나와 나이 차가 스무 살가량 났지만 늘 깍듯이 대해줬다. “장 교수님, 노심 설계에서 이 방법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 박사님 그것은 냉각재 상실사고 해석부터 처리하고 가야 합니다.”

나는 MIT와 미국 벡텔사에서 습득한 원전 설계 기술의 핵심을 카이스트 석박사 과정 수업에 녹여냈다. 특히 원자력 기술 자립의 원년 멤버라 할 수 있는 고 한필순 박사와 이 박사에게 강조했던 노심 설계, 원자로 계통 설계, 핵연료 설계 방법의 깊이 있는 이야기도 그대로 전수했다.

카이스트를 졸업한 학생들은 한국전력에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간부가 되는 제도가 있었다. 한전이 카이스트에 매우 우호적이었는데, 이런 분위기가 기술 자립에 큰 도움이 됐다. 또한 연구소 연구원들을 위한 연구원 석박사 과정도 생겼다. 어느 해는 카이스트에서 배출한 원자력 박사 수가 그때까지 한국에서 나온 원자력 박사 총 수와 같을 때도 있었다.

카이스트 석박사 과정이 성공했던 이유는 노심 설계나 원자로 계통 설계의 주역이 모두 연구원 과정생이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문제 중심 프로젝트 수업을 통해 배우고 연구한 것이 현장에서 팀워크로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82년 귀국하고 보람을 느꼈던 일도 있었다. 84년 충북 음성의 꽃동네 회장인 오웅진 신부를 만났는데, 한날은 이런 요청을 했다. 꽃동네에 100만명의 회원을 관리할 수 있는 전산시스템을 설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장 교수님, 우리 꽃동네가 후원 회원을 관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전산시스템을 좀 설치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멋도 모르고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해 “알겠습니다” 하고 덜컥 약속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엇을 믿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설치에 필요한 큰 금액을 도와줄 후원자가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현대전자 정몽헌 회장이 회사 홍보 차원에서 컴퓨터 서버 프린터를 아주 싼 가격에 설치해줬다. 그것도 전산 시스템 설치 후 회비가 들어오면 천천히 내는 조건이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전도현장을 누비다가 2000년 초에 나만의 전도법을 고안했다. 성경을 5분 이내에 요약해주는 ‘5C 전도법’이었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