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순흥 (14) 카이스트 교회·선교 사역 맡아 많은 기독 교수 배출

장순흥(왼쪽 두 번째) 한동대 총장이 2007년 카이스트선교회 임원과 함께했다. 장갑덕 카이스트교회 목사, 장 총장, 고정훈 루미컴 대표, 이용훈 UNIST 총장, 노시경 카이스트선교회 간사(왼쪽부터).


1991년 카이스트가 서울 홍릉에서 대전 대덕으로 이전하면서 나 역시 서울 덕수교회를 떠나게 됐다. 당시는 교회가 사회봉사관을 건립하고 3부 예배를 신설하는 등 부흥하고 있었다. “손인웅 목사님, 학교가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부득이하게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저런, 덕수교회에 꼭 필요한 분이신데 아쉽습니다. 장 교수님.”

대전에서 첫 신앙생활을 했던 곳은 한밭교회였다. 고 김덕복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시무하시던 교회였다. 김 목사님은 원래 오스트리아 비엔나 한인교회를 담임했다. 그러다 대전으로 옮기게 됐다. 김 목사님과 인연은 내가 국제원자력기구(IAEA) 업무 때문에 오스트리아 빈을 자주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95년에는 김동명 목사님과 ‘죽으면 죽으리라’의 저자 안의숙 사모님이 대전 대덕연구 단지에 교회를 개척했다. 나는 김 목사님의 강력한 권고로 당시 목사님이 이끌던 성경공부에 참석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심정, 돌아온 탕자, 용서받은 탕자의 자세 등을 강조했다. 그 당시 목사님과 함께한 성경공부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다. 마침내 김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개척한 새누리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또한 케냐 선교사로 떠난 임종표 목사님에 이어 카이스트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긴 장갑덕 담임목사님과 함께 교회 지도 교수로 섬기게 됐다. 90년대에는 카이스트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던 존경하는 두 분의 교수님께서 각각 다른 학교로 떠나셨다. 김인수 교수님은 고려대로, 김영길 총장님은 한동대로 떠나시게 됐다. 두 분의 거목이 떠난 뒤 나는 카이스트교회와 카이스트 선교 사역에 관련된 많은 일을 맡게 됐다.

카이스트교회 기도회는 90년대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수의 인원만 모였는데 2000년 이후 많은 이들이 참석했다. 당시 100명 가까운 교수님이 후원해 주실 정도로 부흥했다. 특히 이용훈 교수님(현 UNIST 총장) 등이 기도회, 선교회의 훌륭한 동역자로 섬겨 주셨다. 지금도 카이스트선교회는 많은 선교사를 배출하고 후원하고 있다. 또 카이스트교회 출신의 많은 카이스트 졸업생이 졸업 후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면서 많은 기독 교수들이 배출됐다. 한동대에도 카이스트교회 출신 교수들이 다수 재직하고 있다.

한국형 경수로는 90년대 중반 완성됐다. 차세대 한국형 경수로(APR1400) 사업이 92년 시작돼 2002년 완성, 표준 설계 인가가 마무리됐다. 2009년 UAE에 수출했던 그 유명한 원전이 바로 이 노형이다. 나는 이 사업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다. 특히 개념 설계와 표준 설계 인가에 관여했다.

APR1400 사업이 마무리돼 갈 때 학교에서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 “장 교수님, 카이스트 발전을 위해 헌신하지 않겠습니까. 원자력 발전소를 궤도에 올려놓은 추진력이면 학교 경영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래서 2001년부터 카이스트의 행정 보직을 맡게 됐다. 이후 10년간 기획처장 교무처장 대외부총장 교학부총장 등을 맡으며 카이스트와 한국 대학 사회 혁신이라는 새로운 사명을 맡게 됐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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