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12월 4일] 다시 꿈꾸다



찬송 :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뵈었으니’ 490장(통542)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사도행전 2장 17절


말씀 : 우리는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아이들이 꿈에 대하여 말할 때면 벌써 이루어진 것처럼 설레하는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어 갈수록 어느새 이룰 수 없을 거 같은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서 꿈을 깹니다. 이런 일이 반복돼 나이가 들면 아예 꿈꾸기를 포기해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점점 꿈을 꾸지 않게 되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꿈에 대한 한 가지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어느 날 대통령이 어린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꿈이 뭐니?” “대통령이오. 저도 대통령님처럼 멋진 대통령이 되고 싶어요” “그래 대통령이 되고 싶구나” 천진한 아이를 바라보며 대통령이 묻습니다. “그럼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니...” 어린아이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이야기합니다. “얘야 넌 꿈이 아직 없구나. 꿈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그 작은 일이 너의 꿈이란다. 꿈은 보여주는 거지. 너의 꿈은 지금 이루어지는 거란다.”

꿈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꿈은 미래적이다’라는 생각입니다. 꿈은 앞으로 무엇이 되겠다고 하는 미래에 알 수 없는 시간에 일어날 일이라는 거지요. 과연 그러할까요.

성경에 보면 꿈과 관련해 우리의 상식선에선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있습니다. 다음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임하셔서 감동을 주시는 그런 날에 자녀들이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늙은이들이 꿈을 꾸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 구절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미래적인 꿈을 이루려면 나이 든 사람들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창창한 젊은이들에게나 어울릴 법합니다. 물론 다음세대를 위해서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것도 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하필이면 꿈을 접어야 할 늙은이들이 오히려 꿈을 꾸어야 한다는 말인가.

성경에서 꿈은 미래적인 의미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꿈은 지극히 현재적이고 현실적이며 꿈은 삶 자체입니다. 그 삶을 회피하거나 대충 살아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핑계 대지 않고 현재의 삶을 마주할 때 현실은 꿈이 되고 어느새 꿈은 이루어집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그 모습이 꿈입니다. 그러니 오늘밖에 살아갈 힘이 없는 단 한 사람의 노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꿈꾸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단 하루까지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꿈의 시간은 어제도 아니요, 내일도 아닙니다. 오직 오늘이라는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세상의 시간은 이제 꿈을 꾸기에는 늦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계는 우리에게 오늘을 살며 다시 꿈을 꾸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기도 : 주님 포기했던 꿈을 주 안에서 다시 꿈꾸게 하옵소서. 주저앉아있지 않고 주의 영으로 다시 일어나 꿈을 이루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김혁 목사(변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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