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가장 많이 되새긴 단어는 ‘가난’이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가난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지만 나는 가난 덕분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 곁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내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가난을 통해 나는 주님의 긍휼이 무엇인지 배웠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간 주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어 행복한 삶이었다.
내 부모님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아버지는 자상하고 자식 사랑이 극진한 분이었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는 늘 뒷전이었다. 반면 어머니는 얼마 안 되는 종중(宗中) 땅에 콩 고구마 열무를 심었다. 장에 내다 파는 일까지 당신께서 직접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 혼자 힘으로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수업료를 제때 못내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했다. 참깨 농사를 지어도 참기름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고추 농사를 지었지만 우리집 김치는 항상 하얀색이었다. 닭을 키웠지만 계란은 항상 내다 팔았기에 그 흔한 달걀부침 한번 먹지 못했다.
나는 대전의 변두리였던 대덕군 회덕면 중리에서 7남매(2남 5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전체 순번을 따지자면 다섯 번째였다).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학교를 파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와야 했다. 땔감과 소꼴을 준비하느라 놀 겨를이 없었다. 바쁜 집안일 탓에 공부에 재미를 못 느꼈다. 버스비 5원이 없어 매일 걸어 다닌 것은 견딜 만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놀러 온다거나 선생님의 가정방문 소식을 접하면 경기를 할 정도로 싫었다. 그 시절 가난은 큰 아픔이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한 커피 회사에서 나온 커피 병을 갖고 온 뒤부터는 이게 내 도시락 반찬통이 됐다. 그러나 김치와 장아찌의 염분으로 병뚜껑은 금방 녹이 슬었다. 김칫국물이 새어 나왔다. 국물은 가방 속 책과 노트를 붉게 물들였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붉게 물든 내 교과서와 보혈의 피를 상징하는 성경책 옆면이 같다고 말하곤 했다. 우리 집안 누구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버지께서는 어느 날 중고 가방의 가죽을 이리저리 박음질하고 붉은 구두약으로 광을 낸 가죽 가방을 선물해 주셨다. 비닐 가방 하나 사주기도 부담스러운 아버지의 묘안이었으리라. 당시 가난하지 않은 집이 거의 없을 정도였지만, 아버지는 두 아들은 물론 다섯 딸을 전부 대학 공부까지 시키겠다는 신념이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별도의 수입을 얻기 위해 종친회 일을 시작했다.
가난은 돈하고만 연관된 게 아니었다. 사회성을 익히는 데에도 장애가 됐다. 내가 내향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 데에 가난이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성경에는 가난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가난한 이들과 고아와 과부는 한 세트처럼 등장하곤 한다. 주님은 ‘그들의 주님’이 되신 분이다. 나의 가난이 부끄러움만이 아니었던 건 바로 그런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약력=대전신학대 신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 목회연구과정 수료, 평택대 사회복지학 박사, 대전지역사회선교협의회 간사 및 총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이사, 명성복지재단 이사, 한국교회봉사단 상임이사.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