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종생 (1) 어린 시절 가난은 큰 아픔… 친구·선생님 방문 소식에 기겁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봉사단(한교봉)에서 만난 김종생 한교봉 상임이사. 그는 “만약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가난을 원망하며 잘못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석현 인턴기자


나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가장 많이 되새긴 단어는 ‘가난’이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가난한 집안에서 나고 자랐지만 나는 가난 덕분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 곁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내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가난을 통해 나는 주님의 긍휼이 무엇인지 배웠다. 가난한 이들을 찾아간 주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어 행복한 삶이었다.

내 부모님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아버지는 자상하고 자식 사랑이 극진한 분이었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는 늘 뒷전이었다. 반면 어머니는 얼마 안 되는 종중(宗中) 땅에 콩 고구마 열무를 심었다. 장에 내다 파는 일까지 당신께서 직접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 혼자 힘으로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수업료를 제때 못내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했다. 참깨 농사를 지어도 참기름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고추 농사를 지었지만 우리집 김치는 항상 하얀색이었다. 닭을 키웠지만 계란은 항상 내다 팔았기에 그 흔한 달걀부침 한번 먹지 못했다.

나는 대전의 변두리였던 대덕군 회덕면 중리에서 7남매(2남 5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전체 순번을 따지자면 다섯 번째였다).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학교를 파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와야 했다. 땔감과 소꼴을 준비하느라 놀 겨를이 없었다. 바쁜 집안일 탓에 공부에 재미를 못 느꼈다. 버스비 5원이 없어 매일 걸어 다닌 것은 견딜 만했다. 하지만 친구들이 놀러 온다거나 선생님의 가정방문 소식을 접하면 경기를 할 정도로 싫었다. 그 시절 가난은 큰 아픔이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한 커피 회사에서 나온 커피 병을 갖고 온 뒤부터는 이게 내 도시락 반찬통이 됐다. 그러나 김치와 장아찌의 염분으로 병뚜껑은 금방 녹이 슬었다. 김칫국물이 새어 나왔다. 국물은 가방 속 책과 노트를 붉게 물들였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붉게 물든 내 교과서와 보혈의 피를 상징하는 성경책 옆면이 같다고 말하곤 했다. 우리 집안 누구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버지께서는 어느 날 중고 가방의 가죽을 이리저리 박음질하고 붉은 구두약으로 광을 낸 가죽 가방을 선물해 주셨다. 비닐 가방 하나 사주기도 부담스러운 아버지의 묘안이었으리라. 당시 가난하지 않은 집이 거의 없을 정도였지만, 아버지는 두 아들은 물론 다섯 딸을 전부 대학 공부까지 시키겠다는 신념이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별도의 수입을 얻기 위해 종친회 일을 시작했다.

가난은 돈하고만 연관된 게 아니었다. 사회성을 익히는 데에도 장애가 됐다. 내가 내향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 데에 가난이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성경에는 가난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가난한 이들과 고아와 과부는 한 세트처럼 등장하곤 한다. 주님은 ‘그들의 주님’이 되신 분이다. 나의 가난이 부끄러움만이 아니었던 건 바로 그런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약력=대전신학대 신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 목회연구과정 수료, 평택대 사회복지학 박사, 대전지역사회선교협의회 간사 및 총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이사, 명성복지재단 이사, 한국교회봉사단 상임이사.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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