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종생 (2) 어머니와 다섯 누이만 남게 된 집… 집안일 도맡아

어린시절 살던 집에서 찍은 부모님 사진. 우리 가족은 당시 대전 변두리에 있는 대덕군 회덕면에 살았고 부모님은 모두 농부였다.


우리가 가진 땅은 종중 땅 산비탈의 밭이 대부분이었다. 아버지는 고욤나무에 감나무 접을 붙여 감나무 100여 그루를 심어 돈을 벌었다. 그 까닭에 우리 집은 ‘감나무집’으로 불리곤 했다. 감나무를 지키기 위해 과수원에 집을 지었고, 이곳은 처음엔 원두막처럼 사용하다가 결국엔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가 됐다.

아버지는 고욤나무를 심어 키운 뒤 여기에 감나무 접을 붙이곤 했다. 고욤나무를 대목(代木)으로 삼아 접을 붙여야 감이 맛있어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랐는데, 언젠가 교회에서 ‘돌 감람나무’와 ‘참 감람나무’의 접을 붙인 이야기(롬 11:17)를 듣게 됐다. 나는 이때부터 생뚱맞게도 감나무집 아들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게 됐다.

아버지는 부족한 수입을 채우기 위해 서울로 떠나셨다. 형도 일찍 서울로 유학을 떠난 상태였다. 결국 집안에는 어머니와 나, 다섯 명의 누이만 남게 됐다. 여성에게서 느껴지는 감성적인 성향이 나에게 깃든 것은 이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일 듯하다.

어쨌든 집안에 남자가 나밖에 없는 상황이 되니 거친 일들은 모두 나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무를 하는 일, 소꼴을 베는 일, 감을 따는 일, 감을 시장까지 옮기는 일….

이런 일들을 모두 내가 감당해야 했다. 물을 길어오는 일과 변소의 거름을 퍼내는 일 역시 나의 과제였다. 밭에 고랑을 내고 콩을 심고 고추와 들깨와 고구마를 심는 일도 도맡아 했다. 장마가 끝나면 빗물 때문에 움푹 팬 길을 다시 고르고 한겨울엔 소복하게 길에 내린 눈을 싸리비로 치워야 했다. 이렇듯 다양한 일들을 담당하면서 일에는 요령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일을 시작할 때 대략적으로 전체 그림을 구상한 뒤 세부적인 ‘부분’을 더해 ‘설계’를 마무리하는, 이른바 ‘일머리’가 생긴 셈이다.

이런 시절을 거치면서 집에서 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졌다. 나는 많은 일을 처리하면서 집안에서 인정과 지지를 받는 존재가 됐다. 일에 대한 칭찬과 지지는 나를 집안일에 매진하게 하는 동기가 돼주었다.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교우 관계도 집안일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가난도 학교와 공부를 등한시하게 만든 이유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돼서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공고에 입학했다. 누이들도 소위 지방의 일류학교를 진학했는데, 나는 삼류학교라 할 수 있는 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자괴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집안일로 인한 희생자’라는 지위를 나 자신에게 부여하며 자위하기도 했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인정과 지지를 받았던 것은 이후 내 인생의 큰 자산이 됐다. 아마도 아버지는 당신의 역할을 버겁게 감당하는 어린 아들이 대견스러워 부채감 때문에 인정을 해주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몸 아끼지 않고 애쓰는 것이 가상해 자주 칭찬을 해주시곤 했다. 비록 가난한 집에서 내가 짊어져야 했던 짐은 무거웠지만, 집안에서 나의 역할은 필요했고, 역할 이상으로 인정과 지지를 받았던 것은 책임감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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