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종생 (3) 3박 4일 부흥회 참석 후 등교… ‘김 목사’라 비아냥거려

김종생 목사가 20대 초반, 집 앞 감나무 옆에서 찍은 사진. 김 목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10대 시절 하나님을 만나 신학교 진학을 결정했다.


중학교 2학년 성탄절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선배로부터 성탄절 행사에 오라는 말을 듣게 됐다. 이웃 동네인 송촌리에 있던 금암교회(현 동부제일교회)였는데, 처음 간 자그마한 교회에선 까까머리 학생들이 학생회라는 이름으로 자치회 모임을 하고 있었다. 여학생부터 남학생까지 나이도, 성별도 다양했다. 이들은 스스럼없이 새벽송을 같이 돌았다. 나는 이들과 섞여 교회 속 일원이 됐고 신앙심도 갖게 됐다. 시골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일은 내가 집에서 하던 일과 비슷해 낯설지 않게 교회에 적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무 난로를 사용하는 교회에서는 늘 나무가 부족했다. ‘나무 조달’은 나의 책무가 됐다. 교회에는 남자들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나는 교회에서 일손이 필요할 땐 자주 불려 다니곤 했다. 고등학생이 돼서는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면서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당시 매일 새벽예배를 앞두고 교회에서는 누군가 새벽종을 쳐야 하는데, 전도사님이 사시는 사택과 교회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새벽종 치는 것이 보통 부담이 아니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초종과 재종을 치는 일을 담당하게 됐다. 그런 모습을 보며 전도사님은 “김 선생은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틈나는 대로 말씀하셨다.

이러한 일들이 하나둘씩 쌓이고 반복되면서 언젠가부터 나는 신학교에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고, 그러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다니는 공고는 일반고가 아니어서 학교에서는 진학을 위해 별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태였다. 학원 공부로 대학 진학을 준비해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학원에 가야 했다.

교회 일을 도맡아온 내가 교회를 나오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일뿐더러, 교회로서도 나라는 ‘인적 자원’의 상실은 큰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진학을 위해 대전 선화동에 있는 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학원 가까운 침례교회를 다니게 됐다. 손위 누나와 친구가 다니고 있는 교회여서 나 역시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얼마 뒤 이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열었는데, 향후 신학교에 갈 사람으로서 공부보다는 부흥사경회가 더 소중하다고 여겨 3박 4일간의 집회 참석을 결행했다. 둘째 날 저녁에 담임 선생님이 학교 친구들과 같이 교회에 찾아오셨다. 선생님은 “시험이 코앞인데 고3 학생이 할 짓이냐”며 혀를 차고 돌아가셨다. 하지만 나는 집회를 마치고 나서야 학교에 돌아갔다. 학교에 가니 나를 향해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이때 내게 붙은 별명이 ‘김 목사’였다.

침례교회에 잠시 출석한 것이 계기가 돼 별생각 없이 침례신학대에 진학했다. 그토록 꿈꾸었던 학교였건만, 신학교에서 배우는 신학은 신학이 아니라 목회 기술자를 양산하는 ‘인학’(人學)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그즈음 선배의 소개로 대전의 네비게이토선교회와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경험한 로마서 강해는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려볼 수 있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책 읽기는 나의 습관이 됐고, 당시 경험으로 내 인생 행로는 크게 달라졌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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