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종생 (4) ‘기독교로 위장한 국가전복단체’ 누명에 30개월 옥고

김종생(맨 뒷줄 왼쪽) 목사가 네비게이토선교회에서 활동하던 당시 동료들과 찍은 단체 사진.


대학생을 상대로 한 네비게이토선교회에서는 세 가지에 관심을 두었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이었다. 둘째는 사람의 변화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었다. 셋째는 생활을 같이하는 공동체를 통해 기독교 신앙과 가치를 구현하자는 거였다.

그래서 대안 교육을 하는 거창고와 풀무고, 오산학교 등의 사례를 통해 신앙과 철학을 배웠다. 가족 단위로 공동체를 이룬 원경선 선생 중심의 풀무원, 문동환 목사 중심의 도시 공동체인 새벽의 집, 한국 떼제 공동체, 이현필 선생의 삶이 스며있는 남원의 농촌 공동체 동광 등을 방문하면서 그들의 삶과 철학을 배우기도 했다.

대안 교육의 현장을 둘러보고 여러 공동체와 교류한 경험은 유익했다. 이 도전을 구체화하자는 취지에서 우리는 실험 차원에서 공동체를 꾸려보기로 했다. 마하트마 간디가 인생이란 하나의 실험 과정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 역시 진지하게 공동생활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의 울타리라는 의미를 담아 ‘한울회’라는 이름으로, 대덕군 회덕면 중리에 있는 초기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집을 얻어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방 두 칸이 전부인 공간에서 나를 비롯한 세 사람이 함께 살았다. 각자 자신만의 일정을 가지되, 방문객은 순번제로 오게 하고, 전체가 함께하는 ‘공동의 시간’과 ‘공동의 자리’를 구분했다.

진지한 실험이 한창이던 1980년 2월, 아직은 쌀쌀한 어느 날이었다. 우리가 사는 곳에 형사 여러 명이 들이닥쳤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위 ‘의식화 모임’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대상자를 물색하던 중, 젊은이들이 같이 살면서 많은 젊은이가 드나든 우리의 보금자리가 타깃이 됐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형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연행됐다.

당시 나는 방위병 신분으로 동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군인 신분인 나는 보안부대로 연행됐다. 오랜 취조, 그리고 고문의 우여곡절을 지나 우리가 만든 한울회는 ‘기독교로 위장한 자생적인 공산주의자들로 국가를 전복하려는 단체’가 돼 뉴스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우리의 공소장에는 사도행전 2장과 4장의 초대교회 공동체 내용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공동생활을 하던 3명, 성경을 같이 공부하는 젊은이 10여명, 집회 참석 및 관련자 30여명이 반란의 계획을 꾸몄다는 거였다. 이 사건을 다룬 재판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짜 맞춘 흔적이 많고, 많은 부분이 확대 해석된 부분이 수두룩해서 대법원에서 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되는 핑퐁 재판이 되고 말았다.

길고 지루한 재판의 과정을 거치면서 ‘내용과 형식’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됐다. 우리 모임이 교회와 교단, 나아가 학교 등의 조직에 소속돼 있었다면 이런 피해는 없었을 거였다. 이전까지 나는 ‘내용’만 좋으면 된다고 믿었다. ‘형식’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옥고를 치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내용이 제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형식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과자의 낙인과 30개월이라는 많은 수업료를 내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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