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종생 (5) 며칠째 ‘쉰밥’ 나오자 집단 단식… 주동자로 찍혀 ‘독방’

김종생(왼쪽) 목사가 육군교도소에서 함께 생활한 동료들과 훗날 찍은 기념 사진.


한울회 사건으로 나는 헌병대 유치장에 감금됐다. 조사는 보안부대에서 이뤄졌다. 국가보안법을 어겼다는 혐의가 적용됐다. 나는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다. 육군교도소로 이감됐다.

억울함을 삭히면서 10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매일 고민했다. 그러던 중, 교도소 원목의 위로 방문을 통해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됐다. 내가 있던 특별 사동의 주중 예배를 인도해줬으면 한다는 제안이었다. 나의 죄목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니 사상적인 언급은 절대 엄금이라는 조건이 있었다. 그 순간 사도행전의 바울이 떠올랐다. ‘옥중 전도사’라는 직무에 조금은 의미를 부여하는 수형 생활이 시작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목회자로서의 내 경력이 미미했기에 재소자들을 기도와 말씀으로 위로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옥중 기간을 발전의 기회로 삼기 위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수불석권(手不釋卷)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밤낮으로 읽고 또 읽었다. 그동안 읽지 못했던 성경도 시간을 정해 놓고 읽으며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깊이 되새겼다. 볼펜을 주지 않았기에 성경 속 함축적인 문장이 좋아지면 묵상하고 또 묵상했다. 구약성경의 공동번역 시편은 많은 울림을 주었다. 자작시를 쓴 뒤 컬러 화보의 책에 눌러 보관하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침에 쉰밥이 배식됐다. 재소자들은 의아해 했는데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튿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쉰밥이 나왔다. 아무리 재소자 신분이지만 쉰밥을 먹고 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쉰밥이 나오면 특별 사동 전체가 단식하는 것으로 정하고 방마다 통보했다. 그리고 다음 날도 역시 쉰밥이 나왔다. 우리가 생활하는 특별 사동은 60여명 전체가 단식에 돌입했다.

교도소라는 특별한 조직, 특히 군인 출신이던 재소자들의 집단 단식은 허용될 수 없었다. 나는 단식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됐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검정 호스로 엄청나게 맞았다. 그리고 가로 30㎝, 세로 60㎝ 네모난 시멘트 공간에서 ‘감옥 속 감옥’ 생활을 일주일간 하게 됐다. 일명 ‘독거 특창’인데 이곳에 들어갈 때는 양손을 가죽으로 고정하기에 여름철 모기는 횡재를 맞은 듯 움직일 수 없는 내 몸에서 피를 빨아 먹곤 했다.

그 후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쉰밥을 먹지 않게 됐고, 그 일로 재소자들은 나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다윗 당시의 아둘람 굴에 있던,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삼상 22:2)가 전부 그곳에 모여 있었다. 수형 생활 중 만나본 재소자들의 이야기는 한결같이 재수가 없어서 감옥 생활을 하게 됐다는 거였다. 그 실체야 다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구조와 제도의 희생자라는 사실이었다. 가정과 학교, 나아가 친구 관계가 건강하지 못했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여러 정황이 만든 결과물’이 곧 그들이었다.

내 징역 기간은 상급심에서 줄어 결국엔 2년 6개월간 이뤄졌다. 수형 생활로 갇힌 자의 고충을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됐고, 교정 선교가 부족하다는 사실도 체감할 수 있었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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