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종생 (6) 출소 후 대전신학대 편입, 신학 공부에 몰두하는데…

김종생(왼쪽 두 번째) 목사가 대전신학대 재학 시절 교수, 동료들과 찍은 사진.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의 삶과 역사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됐고, 그분을 의지하게 됐다는 게 가장 큰 소득이었다.

나는 출소하면서 신학 공부를 곧바로 시작하기로 했다. 이전에 다니던 학교는 나의 전과 사실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곳을 찾아야 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소속인 대전신학대에 편입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그곳에 있던 김진영 교수님이 환대해 주셨다. 지금의 내가 있게 된 데는 김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의 배려 덕분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신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교도소 생활은 나의 관점도 많이 바꾸어 놓았다. 틈틈이 책을 읽게 됐고, 교수님들의 강의도 이전보다 성실하게 들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신 이영호 교수님, 프로테스탄트 사상사를 통해 기독교 사상을 폭넓게 이해하게 해주신 고(故) 송기득 교수님,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사회학적 관점으로 보게 해주신 김조년 교수님의 강의는 정말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대전신학회와 현대목회연구회라는 이름의 독서모임을 만들어 같이 책을 읽고 진지한 토론을 이어가기도 했다. 교수님들을 통해 접하는 새로운 가르침도 좋았지만, 동료 신학생들과 보내는 시간도 각별하게 여겨졌었다.

길지 않은 신학교의 수련 기간은 내게 재미있고 신나는 시간이었다. 특히 가난하고 병들고 귀신들린 이들을 위해 이 땅에 성육신하신 주님의 존재를 되새길 수 있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교도소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가난한 자와 포로 된 자와 눈먼 자와 눌린 자’(눅 4:18)들이 모였던 아둘람 동굴의 사람들로 여겨지기도 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사람들과 더불어 사시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신 분이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지독한 가난과 막막한 수형 생활을 겪어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세상의 ‘밥’으로 오시어 밥이 되어주시고, 자신의 살과 피까지 제공해 주신 주님을 본받아야 한다는 게 나의 사명이 됐다. 하나님은 내게 공동체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었고, 공동의 선을 지향할 이유를 가르쳐주셨다. 이런 하나님을 나는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 사는 곳에 좋은 일만 이어질 순 없을 터였다. 학교 행정의 형평성 문제로 학내 분규가 일어났다. 그동안 쌓여 있던 불편한 사안에 대해 학생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다. 어쩌다가 학내 분규의 의견을 결정해 발표하는 성명서 작성이 나의 몫이 됐다. 피해 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성명서를 쓰는 일을 맡게 됐다. 이 일로 교수님들과 나는 다소 불편한 사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신학교 편입을 주선하고 도움까지 줬던 교수님들이 곤란한 상황을 겪어야 했다. 나는 이때의 경험으로 평생 그분들에게 죄스러움을 느끼게 됐다. 이런 우여곡절 이후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목사 고시와 목사 안수를 거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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