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종생 (7) 달동네 공부방 열고 공부는 물론 무료 진료·급식 제공

김종생(왼쪽 네 번째) 목사가 대전에서 공부방 사역을 하던 시절 동료들과 찍은 단체 사진.


신학교 재학 중이던 시절, 나는 대전 낭월교회에서 교육 전도사로 일했다. 이곳에서 나는 사회 선교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사회봉사부에서 총무를 역임하신 고(故) 박창빈 목사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나는 사회 선교에 대한 훈련도 받기 시작했다. ‘도시사회선교권 강화훈련’의 수강생이 됐다.

나는 ‘대전지역사회선교협의회’에서 실무를 담당했다. 협의회는 노회의 전문성이 부족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 2~3개 노회가 함께 사회봉사를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단체였다.

당시 한국 사회에는 도시화와 공업화로 인한 그늘이 짙어지던 시기였다. 도시 변두리에는 달동네가 들어섰고, 이 동네 아이들의 학습 결손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하고 있었다.

우리는 학생들의 미진한 학습을 돕기로 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문화 활동을 벌였다. 식사를 제공했고 무료 진료를 통해 달동네 주민의 보건 수준을 끌어올리는 일도 진행했다. 가장 많이 신경을 썼던 프로그램은 ‘공부방 활동’이었다. 공부방은 도시 공장 주변의 야학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단순히 공부를 가르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공부방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종합적인 지원 프로그램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 대전 지역에도 비슷한 성격의 공부방을 세워 운영하기로 했다. 보문산 자락에 ‘보문 공부방’이, 성남동 지역에는 ‘성남 공부방’이 만들어졌다.

대전의 공부방은 유미란 선생이 시작한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의 ‘산돌 공부방’을 벤치마킹한 형태였다. 이런 곳에 아이들이 올까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매일 어린이들이 몰려들었다. 대학생 자원봉사자의 발길도 이어졌다. 주민들의 반응도 좋았다. 주민들의 호응을 보는 일이 흥미진진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공부방의 공간을 임대하는 것, 그 안에 책걸상 등 집기를 마련하는 일, 간식과 음식 제공을 위한 주방 도구를 갖추는 일 등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실무자들의 열정과 인근 교회들의 동참 덕분에 공부방은 아주 좋은 섬김의 도구로 자리매김했다.

1980, 90년대의 건강보험은 전 국민으로 확대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빈민들을 향한 무료 진료와 급식 제공은 가장 일반적인 섬김 사역이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수련회와 캠프를 열었는데, 이들 활동은 공부방 어린이들이 학수고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협의회에서 운영하는 공부방 2곳의 운영위원장이 됐다. 재정과 자원봉사자 확충, 때로는 외부와 연결하는 중재자 역할까지 감당해야 했다.

공부방에서는 교회 청년들도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나눔의 뜻을 실천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들의 열정과 성실함이 고맙게 느껴진다. 자원이 많이 부족하던 시절에 대학생이거나, 혹은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초년생이던 그들이 항상 자신이 가진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던 모습은 아직도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특히 대학생들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을 공부방 아이들을 위해 쓰는 일에 인색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당시 함께해 주었던 그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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