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종생 (8) 사회 복지 사역 현실은 ‘막노동’… 일 잘하고 욕먹기도

김종생(가운뎃줄 왼쪽 두 번째) 목사가 월평종합사회복지관에서 일할 당시 직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공부방 사역을 하면서 이웃을 돌보는, 좀 더 ‘종합적인’ 일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 즈음 접한 소식이 달동네 빈민에게 주택을 제공하는 영구임대주택사업이 대전에서도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장소는 대전의 월평동이었다. 주택 단지에는 빈민들을 돌보는 사회복지관이 2곳 들어서는데, 이곳들을 민간에 위탁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우여곡절을 겪은 뒤 ‘대전노회유지재단’이라는 종교법인이 월평종합사회복지관 운영을 맡았고, 나는 이 일에 뛰어들게 됐다. 그런데 막상 위탁받은 복지관은 1712㎡(약 518평) 크기의 건물이 전부였다. 복지관 운영에 필요한 각종 집기는 법인에서 부담해야 했다. 직원들도 우리가 충원해야 했다. 누이들 돈을 빌려 겨우 집기 일부를 구매했는데 그때 들어간 돈이 무려 1억5000만원에 달했다.

인사 청탁을 비롯해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 일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우아하게 일하고 싶었으나 막상 마주한 사회복지 사역의 현실은 ‘막노동’ 그 자체였다. 매일 짐을 떼고 나르는 일,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하는 일,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후원받아 나누어주는 일, 물건을 나누어주다가 형평성 문제로 욕을 먹는 일….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이 일에 뛰어들게 된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고뇌의 현장에서 나는 직원들과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직원들과 공동 운명체가 된 것이 그나마 그 시절 내가 느낀 위안이자 희망이었다.

우리는 ‘공부하고 토론하는 복지관’이 되기 위해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다행스럽게도 개관 후 얼마 되지 않아 대전시는 물론이고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우수 복지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 비결을 배우려고 복지관을 찾았다.

대전 대덕구 자활지원센터도 운영하게 됐는데 그간 수행한 복지사업과는 결이 매우 달랐다. 예컨대 아파트 단지마다 버려진 중고 자전거를 고치는 일을 벌였다. 아파트들에 협조 공문을 보내 중고 자전거를 수거한 뒤 수리해 되파는 사업이었다. 공공기관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도 벌였다. 당시 학교와 관공서 화장실은 ‘청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만들어진 일자리는 빈민들을 위한 자활 사업에 활용됐다. 물론 시행착오도 많았다. 노동하지 않아도 지원을 받아온 선례와 관행 때문에 자활이라는 노동에 참여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설혹 노동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양질의 노동자를 만들어내기는 더 어려웠다. 소위 자활 대상자로 분류되는 분들은 나이가 많거나 건강이 좋지 않거나, 근로 의욕이 떨어지는 분들이었다. 이런 분들이 양질의 상품을 생산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일보다 사람 관계가 더 어렵다고 하던데, 자활의 현장이 바로 그랬다. 틈새시장을 찾아낸 뒤 사람들이 요구하는 상품을 만들어내려고 발버둥쳤다. 납품기일을 맞추려고 밤샘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마주쳐야 할 손바닥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나는 이런 허탈감을 자주 느껴야 했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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