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종생 (9) 예장통합 사회봉사부 총무로 선출… 소외된 현장 찾아

김종생(오른쪽) 목사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로 재직하던 시기, 인천에서 ‘북한 콩기름 75t 지원 감사예배’에 참석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대전에서 월평종합사회복지관과 정림종합사회복지관, 대덕자활지원센터, 유성구노인복지관 등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이들 기관에 몸담으면서 늘 자문한 것은 ‘일반 사회복지’와 ‘기독교 사회복지’의 차이점이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었기에 복지 기관을 위탁받아 운영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 탓에 10여년간 여러 기관을 운영하면서 대전에서는 주목을 받았으나 기분이 마냥 좋을 수만은 없었다. 타성에 젖어 내가 이룬 성과에 취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도 많았다.

떠날 때가 됐음을 직감하고 있을 즈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에서 사회봉사부 총무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나는 지원서를 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지원을 희망한다고 쉽게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1차 인사위원회에 참여한 위원은 사회봉사부 실행위원 15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노회에서 선출된 목사와 권역별 순번이 돼 대의원이 된 분들이었다. 실행위원회에서 지원자 8명 가운데 2명을 추천했고 2차 인사위원회가 열렸다.

당시 나는 ‘총회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얼마간 순진한 마음으로 지원한 터라 인사위원회 과정을 거치면서 당황할 때가 많았다. 총회는 지연과 학연의 인맥이 작동하는, 완전히 색다른 세계였다. 걱정도 되고 후회도 됐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자고 생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총무 자리에 앉게 됐다. 제도권 사회복지 기관 종사자 때와는 다른, 종교직으로서의 별정직 공무원 세계에 몸을 담게 된 것이다.

총무의 역할은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적절한 정치’를 해야 하는 자리였다. 어느 직원의 말처럼 총회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았다. 주님을 의식하고 교회를 의식하는 것보다는 힘 있는 총대들의 기호에 맞추는 것이 생존 법칙처럼 여겨졌다. ‘이러려고 그렇게 몸부림치며 총회 입성을 희망했던 것은 아닌데’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렇지만 이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한 가지 일을 하고 싶었다. 아픔과 눈물이 있는 소외된 현장의 소리를 찾아 듣는 것이었다. 내가 들은 이웃의 신음을 전문가 입장을 담아 해법을 제시하고 제도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가령 발달장애인에게도 세례가 행해질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나는 그 근거를 찾기 시작했고, 결국엔 중풍 병자가 그 친구들로 말미암아 병 고침과 구원을 얻게 된 사실을 성경에서 발견했다. 장애 탓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발달장애인도 그 부모의 고백을 통해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했다. 이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감격스럽게 느껴진다.

홀로 된 사모님들을 대상으로 목회자 유가족협의회를 조직하고, 이를 총회 산하 단체로 자리매김하게 한 것도 큰 보람을 느낀 일이었다. 은퇴한 목회자들을 위한 정책도 만들었다. 은퇴 목회자 중에는 연금에 가입하지 않아 노후가 막막한 경우가 많았다. 이런 목회자들을 위해 이들이 자녀로부터도 도움을 받기 힘든 경우, 총회와 노회가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일조한 일 역시 큰 기쁨으로 남아 있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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