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종생 (10) 사랑의 연탄 나누기 운동… ‘마을 목회’로 발전

김종생 목사는 ‘목회자 유가족협의회’가 만들어지는 데 일조한 일에 대해 큰 보람을 가지고 있다. 사진은 2007년 8월 30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었던 ‘목회자 유가족 실태조사 연구발표회’.


우리 교단이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는 영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처럼 ‘브랜드화’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고민 끝에 ‘사랑의 연탄 나누기’ 사업을 시작했다(총회는 지금도 이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일을 벌일 수 있게 해준 분이 연탄은행 설립자인 허기복 목사다. 나는 지금도 어쩔 수 없이 연탄을 사용해야 하는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사랑의 연탄 나누기’ 운동을 벌이면서 연탄 가격 수준과 연탄 배달의 어려움을 알게 됐다. 가난 탓에 연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경제적인 곤란함을 넘어 불편함과 번거로움까지를 떠안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총회는 연탄 후원을 위한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대상자를 찾거나 추천받기 위해 자연스럽게 관공서와 접촉하게 됐다. 연탄 봉사는 교단을 홍보할 기회로 자리잡았다. 아울러 지역 사회와의 접촉면도 넓어졌다. 연탄 외에도 김치와 쌀, 나아가 내복이나 방한복에 이르기까지 지원 품목은 계속 늘어났다.

교인만을 대상으로 하던 목회가 소외된 주민들에게까지 확대되면서 지역 목회자들 시야에 ‘마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탄 봉사는 그렇게 목회의 성격도 바꿔놓았다. 몇몇 지역의 목회가 ‘마을 목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돼주었다.

목회자 유가족을 상대로 펼친 일들도 기억에 남는다. 2006년 9월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로 재임하고 있을 때 목회자 유가족들과 첫 간담회를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윤의근 목사님이 사회봉사부장을 맡고 계실 때였다. 당시 우리 교단 목회자 유가족은 175가정이었다. 목회자 유족들은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장을 잃은 슬픔과 정체성 혼란,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2007년 9월 총회에서 ‘목회자 유가족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사회봉사부 산하 단체가 만들어졌다. 재정적인 문제로 잠시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목회자 유족들의 간절함이 하늘의 보좌를 움직였던 것 같다. 교계 지도자들의 마음이 모아졌고 그렇게 이 조직은 힘차게 출발할 수 있었다.

홀로 된 사모들의 교회 내 지위와 직분, 그리고 경제적 지원은 제도적으로 보완될 필요가 있었다. 이들을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게 하는 부분은 생활비와 자녀 교육비였다. 자신들을 향한 교인들의 인식,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도 허투루 여길 수 없었다.

가령 어느 교회에 가든지 이들은 자신이 어떤 호칭으로 불려야 할까 생각하며 난감해하곤 했다. 사모라는 호칭은 사별 후 맨 먼저 잃게 되는 이름이었으니까 말이다.

호칭이 사라지면 관계는 금방 서먹해진다. 내가 아는 어떤 사모는 새로운 교회에 가서 권사도 집사도 아닌, ‘성도님’으로 불리다가 새신자 등록과 함께 교리 공부까지 했다. 목회자 남편을 떠나보낸 사모들에게 적절한 호칭이 필요한 셈이다.

목회자였던 남편을 먼저 하나님 곁으로 떠나보낸 사람들은 큰 아픔을 감당하며 살아간다. 교회의 관심과 지원은 줄어들지만 ‘목회자 가족답게’ 생활하길 기대하는 시선은 오히려 더 강해지곤 한다. 우린 그들을 존중하고 지지하며 돌봐야 할 것이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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