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종생 (14) 위안부 피해 할머니 쉼터 마련… “모두 하나님 은혜”

김종생(오른쪽) 목사가 2012년 10월 위안부 할머니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마련된 것을 기념하는 입주 감사예배에서 발언하고 있다.


2019년 1월 28일 별세한 김복동 할머니는 열네 살 때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가는 줄 알고 집을 나섰다가 위안부 생활을 시작했다. 할머니는 이렇게 회고했다. “평일에는 15명쯤, 토·일요일에는 셀 수가 없다. 너무 많아서. 한 50명쯤 됐을 거라. 씻을 시간도 없이 짐승만도 못한 삶을 견뎌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돌아온 것은 가족들의 외면이었다. “내가 나를 찾으려고 하니까 큰언니가 말렸어. 조카들 생각해서라도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 그래도 나를 찾고 싶었어. 예순두 살에 나를 찾으려고 신고했어. 신고하고 큰언니가 발을 끊었어. 우리 아버지, 엄마 제사 지내주는 조카들까지. 나를 찾고, 더 쓸쓸해졌어.”

이것은 국가와 사회, 교회가 개인의 소중한 삶이 폭력의 역사에 묻혀버리도록 침묵했을 때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010년 8월 15일 서울광장을 비롯한 전국 81개 도시와 해외 75개 도시에서 기독교인 100만명이 참석한 ‘한국교회 8·15 대성회’가 열렸다.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이순덕 할머니는 발언자로 나서 “일본 정부가 아직도 잘못을 사죄하지 않고, 공식 배상에도 나서지 않고 있다”며 “한국교회가 이 일에 함께해 하루빨리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서울 명성교회는 새 성전 입당 기념으로 2012년 3월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지하 1층과 지상 2층의 단독주택을 매입했다. 이를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은 무상으로 새로운 생활 터전을 받게 됐다.

정의기억연대는 당시 서울 서대문 충정로에 위안부 할머니 쉼터 ‘우리 집’을 운영했지만, 시설이 낡고, 재개발 지역으로 옮겨달라는 통보까지 받은 상태였다. 정의연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필자는 명성교회에 쉼터 현황을 알렸고, 김삼환 목사의 공감과 교인들의 동의 속에 지금의 연남동 쉼터를 받게 됐다. 2012년 10월 입주 감사예배에서 불교 신자인 김복동 할머니는 “짐승도 자기 누울 곳이 있는데 오랜 떠돌이 생활 끝에 새 쉼터가 생긴다니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다”며 “사회에서는 늘 차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지만 한국교회와 함께하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마포 쉼터는 지하 1층(방 2개, 화장실 1개), 지상 2층(방 5개, 화장실 3)의 주택이었다. 이곳에는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어하는 할머니들의 건강을 고려해 승강기가 설치됐다. 고(故) 이순덕 할머니와 김복동 할머니가 살아생전 머물렀으며, 마지막까지 길원옥 할머니가 거주하다가 지난해 6월 가족에게 돌아가면서 8년의 역사가 마무리됐다.

30여년 전, 서울 연동교회 교인인 김학순 할머니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관심과 배려 속에 1991년 8월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였던 자신의 아픔을 최초로 증언했다. 기자회견 이후 238명의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모였다. 92년부터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수요 집회가 열렸고, 일본 정부는 93년 사과문을 발표했다. 앞으로도 한국교회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옆자리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길 소망한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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