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의식 (2) “의식인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어머니의 폭탄선언

김의식(오른쪽) 목사가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 두 여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김 목사는 어릴적 큰 약방을 운영하시던 아버지 덕에 윤택한 가정 환경에서 살았으나 학교와 교회에서 문제아였다.


부모님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셨다. 내 위로 누나와 형, 그리고 아래로 두 여동생이 있다. 모두 부모님의 신앙을 이어받아 교회를 섬기며 각각 의사 약사 한의사 간호사 그리고 목사 가정을 이뤄 복되게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셋째인 나에게 있었다. 부모님은 약방이나 교회 일로 늘 바쁘셔서 여러 자녀에게 깊은 사랑을 쏟아 주기 힘들었다. 더욱이 나는 남매 중 한가운데에 샌드위치가 되어 위로도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아래로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 상처는 처음엔 부모님에 대한 불순종과 형제들과의 다툼으로 터져 나왔다. 어머니는 나에게 “저것은 형이나 누나는 안 닮고 동생들만도 못하니 어디다 써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어쩌다가 저런 것을 낳았는지 모르겠어야!”하고 한탄을 쏟아놓으셨다. 그때마다 내 상처는 더 깊어졌고, 점점 그 증상이 가정 밖에서도 나왔다. 학교에서 애들을 얼마나 두들겨 팼던지, 사흘이 멀다 하고 친구 엄마들이 약값을 받으러 집으로 찾아왔다. 그나마 아버지가 약방을 경영해서 그 약값을 댈 수 있었다.

교회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교회에 처음 오는 아이들을 못 나오게 하고 여자아이들을 괴롭혔다. 선생님들은 선임 장로 아들인 나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어느 날 한 선생님이 나를 예배당 밖으로 끌고 나가 “의식아, 너는 왜 1년 내내 아프지도 않냐?”고 하셨다. 그때 나는 선생님이 내 건강을 걱정해서 하는 말인 줄 알고 “원기소와 에비오제(당시 어린이 영양제)를 먹어서 튼튼해요!”라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약방을 해서 원기소와 에비오제를 군것질거리처럼 먹었으니 얼마나 튼튼했겠는가. 나는 학교폭력을 넘어 교회폭력의 주범이 돼 있었다.

이렇게 안팎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동안 어머니의 속은 썩을 대로 썩어만 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난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우리 5남매를 모두 불러 모으셨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다른 자식은 다 내가 낳았지만, 의식이 저것은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폭탄선언을 하셨다. 그날 어머니의 폭탄선언은 나에게 씻을 수 없는 평생의 상처가 되고 말았다. 어린 내가 그날 저녁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53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저녁의 기억만은 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당시 온 가족이 한 방에 모여 잤는데 그날 밤에는 부모님이나 다른 형제들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래서 방구석에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를 적실 정도로 한없이 울면서 속으로 외쳤다. “엄마! 엄마는 지금 어디에 계세요?” 다음 날부터 더 이상 의붓부모님(?)과 의붓형제들(?)과 함께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어디 갈 만한 곳도 없었기에 나는 열 살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로 했다. 아버지 약방의 극약통에 있던 사이나(청산가리)를 꺼내 먹으려 했는데 크기가 주먹만 해서 한입에 먹을 수 없었다. 깨뜨려서 먹으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 주려고 하셨던지 잘 깨지지 않았다. 그날 자살 시도(?)는 실패였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상처는 나를 점점 내성적으로 만들었고 위축시켰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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