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의식 (4) “주님, 저 좀 살려주세요” 간절한 기도에 성령 임재

김의식(화살표) 목사가 1978년 서울 성서침례신학교(현 성서침례대학원대) 입학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목사는 한양대 재학 시절 성령을 통한 병 고침을 받고 야간에 신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숭일중학교와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77년 한양대 공대에 입학했다. 슈바이처 선교사의 삶에 감명을 받아 재수하며 의대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방황이 시작됐다. 춤을 배우고 술을 마셨다. 그해 11월 종강 파티를 마치던 날 밤 서울 마포구 집으로 돌아와 쓰러졌다.

처음에는 몸살감기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2주 동안 약국에서 약을 지어 먹어도 고열과 오한이 그치지 않았다. 한 달이 넘게 신촌의 작은아버지 병원이며 고향의 전남대병원을 찾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다시 서울 병원으로 가기로 하고 고향 집에서 링거를 꽂고 누워있을 때였다. 장롱 선반 위에 있는 아버지의 성경책이 눈앞에 들어왔다. 그때 저 성경책을 붙잡으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강렬한 충동이 솟구쳤다. 성경책을 붙들고 엎드려서 “하나님 아버지,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그 말씀대로 순종할 테니 저 좀 살려 주십시오!”하고 성경책을 펼쳤다. 그때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말씀을 읽는 순간 방황했던 대학 생활이 동영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때 비로소 내가 왜 이 질병의 고통 가운데 몸부림쳐야 했는지 깨달았다.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면서 “하나님 아버지, 저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저를 한 번만 살려 주시옵소서! 살려 주시면 남은 삶을 주님과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드리겠습니다” 하는 간절한 기도가 터져 나왔다. 얼마 동안 눈물, 콧물을 쏟으며 울부짖었을까. 갑자기 머리와 등을 따라 성령님의 불이 임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아,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 주신다는 약속의 징표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기력을 되찾은 지 사흘도 안 되어 나는 78년 1월 1일 고향 교회 바닥에 엎드려 눈물로 주의 종으로서 헌신기도를 올렸다. 두 달간 요양 후 서울에 올라와 연세대 신학대에 편입하고자 했으나 이과에서 문과로 편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종윤 은혜성서침례교회 목사님의 소개로 야간 성서침례신학교(현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에 입학했다. 공대 강의가 끝나면 부리나케 신학교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그때 포스터 선교사님을 만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미국 침례교의 복음주의 성서신학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더구나 포스터 선교사님이 미국의 유명한 영적 강해 설교가인 워렌 위어스비 목사님을 소개해 주셔서 강해 설교의 기초를 닦았다. 그렇게 성서침례신학교를 3년간 장학생으로 다니고 최우수 졸업생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주의 종으로 부르실 거면 왜 공학을 공부하게 하셨을까 하는 의혹을 품었다. 그런데 은혜성서침례교회에서 중고등부를 맡으면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증거했더니 많은 학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2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중고등부가 3년 뒤에는 70여명으로 부흥했고 목회자가 7명이나 나왔다. 그 가운데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신학대학원인 미국의 서남침례신학대학원 최초의 아시아계 교수 김종환 박사도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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