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당이 동네 사람들에게 봉투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토요일까지 일하고 일요일 하루 녹초가 된 몸을 쉬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삐삐가 울려댔다. 낮이든 밤이든 시간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찍히는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면 시민단체 직원의 다급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사진기자를 호출하고 또 한 명, 경찰서 친한 정보과 형사에게 장소를 알려준 뒤 1시간 남짓 차를 몰아 현장으로 달려가면 한 발 늦기 일쑤였다. 다행히 시민단체가 찍은 현장 사진으로 기사를 쓸 수 있었다.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박찬종 후보 등이 나섰던 1992년 대통령선거 때 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이다. 어느 후보는 매일 대형 관광버스에 사람들을 태우고 아산만 간척지에 데려가 쌀을 나눠줬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또 어느 후보는 지방순회 기자간담회를 하면서 촌지를 돌리기도 했다.
바랜 기억 속에서 30년 전 대선 풍경을 끄집어낸 것은 대선을 두 달 앞둔 요즘 모습이 그때와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아서다. 유력한 두 대선 후보는 나라 곳간은 생각지 않고 퍼주기 경쟁 중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지난주 탈모 치료제의 건강보험 적용을 언급하면서 탈모인 인터넷 사이트에서 지지 선언이 잇따르자 임플란트 건보 적용 확대도 검토 중이다. 지난해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던 전 국민 재난지원금도 ‘소비 쿠폰’으로 이름을 바꿔 다시 주겠다고 한다. 올해 607조원의 ‘슈퍼 예산’을 통과시킨 게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민주당은 이 후보 공약에 들어갈 돈을 마련하느라 다음 달 임시국회에서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라고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뒤질세라 병사 월급 200만원과 수도권 광역급행철도 연장 및 신설로 맞불을 놓고 있다.
30년 전에는 대선 후보들에게 거는 희망이라도 있었다. 오랜 독재와 군사정권에서 고통받던 국민에게 민주화 열망이 거셌고, 6월 항쟁 이후 두 번째 치르는 가슴 벅찬 직접 선거였다. 40대의 김모 정보과 형사는 ‘선생님’ 이름을 따서 아들 이름을 지을 정도로 어느 후보 광팬이었다. 경제 대통령을 내세웠던 모 후보에게는 국내 최대 기업을 일군 것처럼 경제대국을 만들어 더 잘살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 두 대선 후보한테는 뭘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희망은커녕 누가 당선되더라도 걱정이 앞선다. 현 정권에서 롤러코스터를 탄 칼잡이 출신의 후보가 당선되면 어떤 드라마가 펼쳐질지 훤하다. 이 정부에서 당한 능욕을 갚기 위한 ‘복수혈전’이다. 그가 만약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다면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강단 있는 검찰총장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기본소득 공약이나 국토보유세 등을 손바닥 뒤집듯 철회하는 후보에게 나라를 맡기는 것도 불안하다.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등 가진 자들의 대물림을 막고 보편복지정책을 펴겠다는 문재인정부의 핵심 정책이 줄줄이 흔들리고 있다. 불확실성이 권력을 잡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치 철학이나 신념은 어디로 사라지고 여론조사 숫자에 춤추고 있는 게 이 나라를 끌고 가겠다는 지도자들의 모습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지도자가 안 보인다. 갑자기 성경책 들고 교회를 찾아다니고, 지하철 타고 시장이나 마트에 가서 장 보고…. 국민의 일상을 뒤늦게 체험해 보겠다고 ‘쇼’하고 있는 대선 후보들이 위선적으로 비친다.
누구를 뽑아야 할까. 얼마 전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에게 물었다. “간단하다. 국민을 섬길 줄 아는 지도자다. 예수님은 당시 가장 진보적이셨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모두 다 똑같은데 권력자가 군림하는 거를 보신 것이다. 그래서 소외된 이들을 섬기셨듯 대통령도 그래야 한다.” 이찬수 분당우리교회 목사는 지난 주일 설교에서 “어느 후보가 모세와 같이 마음을 비우고 나라를 위해 헌신할 사람인지 영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노답이다.
이제는 되풀이되는 대통령 흑역사를 그만두고 거버넌스(지배구조)를 바꾸면 어떨까. 제왕적 대통령이 5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나라를 망치도록 내버려 둘 것이 아니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처럼 못하면 1년 만에 내려오고, 잘하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처럼 16년이라도 하도록 해야 한다.
이명희 종교국장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