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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 목사의 묵상 일침] 천국의 인간관



마태복음 25장에는 이른바 ‘양과 염소’ 비유가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심판하는 날을 그린다.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모든 사람이 둘로 구분된다는 것이 이 비유의 설정이다. 그렇게 구분된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결말이 주어진다.

임금은 먼저 오른편 사람들에게 말한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임금은 뜻밖의 이유를 덧붙인다. 임금이 주릴 때 먹을 것을,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다. 나그네 되었을 때 환대했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위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선 이들은 왕에게 반문한다. “우리가 어느 때에 그렇게 행했습니까.” 애초에 그들은 임금이 그런 처지에 있는 것을 본 적도 없고, 그렇기에 당연히 임금을 도운 적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의 대답은 더 놀랍다.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반면 왼편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한 영원한 불로 향해야 했다. 이들은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던 것일까. 그러나 임금은 그들이 자신의 곤고한 상황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을 말한다. 왼편 사람들도 당연하게 반문한다. “언제 우리가 임금님의 곤경을 보고도 모른 체했단 말입니까.” 임금은 역시나 앞의 이야기를 되풀이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비유는 사실 너무 충격적이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대한 태도가 양과 염소를 가른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불편한 이야기를 외면하고 싶어한다. 아니면 반대로 우리가 구제도 하고 선행도 해야 구원받지, 믿음만으로는 안 된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그 심층적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약자들을 향한 섬김은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율법은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를 기억하여 나그네를 돌보라’고 말씀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섬김과 구제는 단순한 인류애적 차원이 아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식, 곧 인간관의 문제이며 그렇기에 신앙의 문제다.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비유가 드러내는 가장 충격적인 모습은 임금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와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 나라의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인 우리와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예수님은 가장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되셨다.

오른편에 선 의인들에게 나라가 상속된다는 것은 그들이 임금과 함께 그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연약한 자를 자기와 동일시하며 사랑하는 분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사람들만 임금과 함께 그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은 시선과 마음을 가진 이들이다.

그러므로 연약한 이웃을 향한 교회의 섬김은 사역이나 프로젝트일 수 없다. 사명이라 하기 이전에 사랑이요 정체성이어야 한다. 새해에 우리가 딱 한 가지 바꿀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사람에 대한 시선이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뀌는 것이다. 연약한 나그네를 향한 마음이 예수님의 긍휼 마음으로 새로워지길 소원한다. 주님의 마음과 시선이 머무는 곳에 우리가 있기를 기도한다.

송태근 삼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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