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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 목사의 묵상 일침] 공동체를 향하는 기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 곧 주기도문에 나타나는 특징을 한 가지 꼽자면 바로 ‘우리’라는 단어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되는 기도는, 계속하여 ‘우리의’ 일용할 양식, ‘우리의’ 죄 용서, ‘우리의’ 시험에서 벗어남을 간구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서 이 기도는 애초에 공동체적인 기도로 주어졌다. 분명 개인이 홀로 이 기도를 드릴 수 있지만 우리는 이 기도를 할 때마다 공동체를 의식해야만 한다.

우리는 기도를 개인 경건 생활의 영역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개인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 기도를 할 때마다 내 옆의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삼시 세끼를 든든히 먹는다고 해도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때, 내 옆 형제의 끼니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의 기도는 나의 문제를 넘어 우리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넘어져 있는 연약한 형제들을 그저 남들처럼 멀리서 손가락질하고만 있을 수 없다. 구약의 다니엘만큼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했던 사람이 당대에 없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자신을 영적으로 우월한 자리에 두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우리의’ 죄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그는 조상들과 당대 사람들을 분리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 유행했던 속담 중에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말이 있었다. 아버지들, 곧 조상들 때문에 지금 나라가 이 꼴이 됐다고 핑계를 대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면피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조상들이나 우리나 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범죄했다고 자복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구했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곧 ‘우리’라는 공동체를 바라보게 하는 렌즈다. 기도는 우리의 시야를 넓혀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한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 신앙의 개인주의다. 신앙생활을 개인의 영역으로 남겨놓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더 큰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개교회주의’다. 다른 교회들이야 어떻든 간에 우리 교회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하는 태도다. 한국교회를 비난하면서, 자신의 교회는 우월하다는 듯 생각하는 태도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나라라는 넓은 차원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당장 내 눈에,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것에 대해 마음을 갖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도는 바로 그러한 눈을 열어 준다. 더 넓은 하나님의 경영을 보게 한다.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저 멀리서 고군분투하는 교회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열어 준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교회는 각자도생하는 곳이 아니다. 개인의 능력에 모든 것을 맡기면 된다는 발상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서는 안 된다. 기도는 나의 문제를 넘어 우리의 문제를 보게 한다. 나의 배고픔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배고픔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강하고 깨끗하다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력함과 죄를 끌어안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도록 이끈다.

기도의 자리는 우리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경영에 눈을 뜨게 하는 자리다. 기도가 넓어지는 만큼 내 주변과 이웃에 대한 헤아림도 더 깊어질 것이다. 나의 아픔을 넘어 교회와 이웃의 슬픔과 고통을 끌어안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더욱더 많이 세워져 가길 소원한다.

송태근 삼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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