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건숙 (8) “누가 너더러 교회 나가라고 했어” 호통치며 볼기짝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1941년 첫 돌에 촬영한 기념 사진. 오른쪽은 판사가 된 오빠.


내 유년의 숲에 보이는 아버지의 서재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사면이 책으로 꽉 차 있었다. 책 좋아하고 낙천적인 아버지였다. 법조인 중에서도 검사였다. 그가 산 시대는 가장 격렬한 전쟁을 통과하는 불운의 시대였다.

아버지는 굉장히 가정적이어서 휴일이면 가족들을 데리고 산속의 호수나 냇가로 가서 낚시를 했다. 지독한 낚시꾼으로 신혼 첫날밤 신혼부부가 사라져서 할머니는 일꾼들과 함께 횃불을 들고 찾아다녔더니 깊은 산속 호숫가에서 신랑이 신부를 곁에 앉혀놓고 낚시를 드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정도로 아버지는 낚시를 즐겼다. 내 어린 시절 추억에도 어머니가 예쁘게 만들어 입힌 원피스를 입고 챙 넓은 모자를 쓰고는 물가를 어릿댔던 기억이 생생하다. 냇가에 솥을 걸고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가 잡아 올린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온 식구가 물가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던 추억도 많다. 친정어머니의 특식인 붕어조림은 그 맛이 아주 특이해서 그걸 전수 받은 나는 가끔 지금도 그 엇비슷하게 붕어조림을 해내놓으면 식구들이 환호하기도 한다.

아버지와의 추억 중에 제일 강렬한 것은 교회와 연관이 있다. 모두 교회를 나가지 않는 상태에서 나 혼자 동네 교회를 나가게 됐다. 호기심 많은 나는 아이들이 몰려 들어가는 동네 교회에 갔다가 성탄절 어린이 잔치에서 연극 시작 전에 앞에 나가 인사를 하는 순서를 맡게 됐다. 한글을 읽지 못하는 어린 꼬마에게 주일학교 선생님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읽어주면 그걸 외워서 하라고 시켰다. 아마도 네 살이나 다섯 살로 귀엽게 옷을 입은 내가 선생님 눈에 띈 모양이다. 많은 학생 중에 내가 뽑혔으니 나는 너무 자랑스러워 아버지 서재인 2층의 가파른 층계를 기어 올라가서 아버지에게 주일학교 선생님이 써준 종이쪽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그걸 읽어본 아버지는 나를 아버지 무릎 위에 엎드려놓고 볼기짝을 눈물이 나도록 짝짝 때리는 것이 아닌가.

“누가 너더러 교회에 나가라고 했어. 네 엄마도 교회 못 나가게 하는 판에 네가 왜 거기에 가니.”

아버지는 그 당시 지성인들이 선호하는 무신론자로 하나님이 없다고 야단을 치는 분이었다. 반면에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로 교회에서 세례까지 받은 분인데 아버지의 고집에 꺾이고 할머니까지 시집살이를 시키니 꼼짝 못 하고 교회에 다니질 못하고 있는 상황인 걸 어린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어머니가 교회에 보낸 것이 아니고 나 스스로 찾아간 교회를 놓고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지청구를 무섭게 들은 셈이다. 더구나 엉덩이를 맞은 아픔은 너무 깊게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다.

나와 교회의 관계는 이렇게 시작됐다. 하나님은 어려서부터 나를 쓰시려고 선택하여 강제로 끌어내신 것이다. 아버지가 이러니 나는 어머니에게 매달려 원고를 전부 외워서 성탄절 전야에 무대 앞에 나가 인사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는 교육열이 대단했다. 서울 덕수궁 근처 검사실에 출근할 적엔 꼭 오빠와 나를 황금정 육정목에 있는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에 데려다주고 가셨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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