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건숙 (9) 유치원 일찍 들어갔다가 아버지의 애물단지 되다

소설가 이건숙(앞줄 오른쪽 두 번째) 사모의 1944년 가족 사진. 뒷줄이 아버지와 어머니다.


아버지는 밀수업자들을 맡은 검사라 무엇이 그리 위험한지 베개 밑에 권총을 감추고 주무셨다. 안방에서 아버지 어머니 옆에 막내 남동생이 눕고 나란히 나와 오빠가 누워서 잤다. 부엌일 하는 처녀는 다른 방에서 자고 진돗개와 더불어 송아지만큼 큰 개가 집을 지켰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데 적산가옥인 안방 창가에 자색 목련꽃이 핀 봄날이었다. 머리맡 요강에서 오줌을 누던 나는 목련꽃 옆에 서서 방안을 엿보는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천으로 입을 가린 남자를 보았다. 팬츠도 올리지 못하고 고함을 치면서 엄마 아빠 사이의 이불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자 아버지는 베게 밑에서 권총을 빼 들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대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깨는 바람에 소란했다. 나는 아버지가 권총을 들고 뛰어나가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아주 어릴 적인데도 아버지 흉내내는 걸 좋아했다.

아버지는 내가 지능이 낮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모양이다. 넓은 울안에 갇혀 담 밑 흙을 가지고 놀기만 했으니 완전히 갇혀 지낸 꼴이라 저능할 수밖에 없지 아니한가. 그렇게 가둬놓은 이유는 어려서 무척 얼굴이 희고 눈이 맑았다고 한다. 게다가 어머니는 고운 색의 원피스를 손수 재봉질해 만들어 입히고, 언제나 챙이 넓은 모자를 씌워놓으니 사람들 눈에 인형처럼 예뻐서 어쩌다 밖에 데리고 나가면 사람마다 만져보니까 보물처럼 집안에 감추고 살았던 모양이다. 특히 옆집에 살던 변호사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출근할 적에 우리 집 대문 앞에서 기다려 나를 보고야 출근을 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유치원에 보냈다. 일꾼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나를 유치원 뜰에서 선생님께 인계하고 갔다. 나는 아침마다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쪼그리고 앉아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인 선생님에 모두 일본 아이들 틈에 끼어 앉았다. 나는 벙어리처럼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꾼이 자전거에서 내려놓으면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다가 선생님이 와서 안고 가면 내려놓은 자리에 나무인형처럼 까닥 않고 앉아 있으니 한 달이 지난 뒤에 어머니를 불러 아이의 지능이 아직 어리니 1년 뒤에 다시 유치원에 보내라고 해서 쫓겨났단다.

그래서 아버지는 몸도 왜소한 내 건강을 위해 무용소에도 보내고 가정교사를 배치해 공부도 시켰다. 어머니는 매일 내 옆에 붙어 앉아 동화를 읽히면서 안달을 했다. 사범부속초등학교는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으나 아버지는 악착같이 오빠와 나를 거기에 보냈다. 첫 학기에 우등상을 받아왔던 밤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우리가 잠든 늦은 밤에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면서 양갱을 드셨다. 우리에게는 이빨이 상한다고 숨겨놓고 꼭 밤이면 두 분이 그걸 드시면서 다정한 대화를 나누신다.

“오늘 건숙이가 우등상을 타왔어요.”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내 우등상장을 내놓는 모양이다. 나는 자는 척하고 두 분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지능이 낮은 건 아니란 뜻이지. 아휴!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저 유치원 퇴학 사태로 나는 아버지의 애물단지였나 보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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